해설시

유계영, 「온갖 것들의 낮」 평설 - 오형엽

공산(空山) 2022. 8. 31. 09:59

   온갖 것들의 낮
   유계영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어요
   하나의 의문으로  

   빨강에서 검정까지
   경사면에서 묘지까지
   항문에서 시작해 입술까지
   공원이라 불렀다  

   바람이 불자 화분이 넘어졌다
   화분이 산산조각 나는 것을 보고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 어제 탔던 남자를 오늘도 탔다
   내가 누구인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어제 먹어치운 빵을 태양이 등에 업고
   나는 태양을 등에 업고
   너는 나를 등에 업고  

   비둘기가 아주 잠깐 날아올랐지만  

   층층이 흔들렸다
   공원의 한낮이 우르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날씨에 대한 이야기만을 나누며
   집으로 돌아갔다

 


   —시집『온갖 것들의 낮』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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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계영은 시의 제목을 1차적으로 본문의 다양한 세부 중에서 하나를 취사선택하여 제시함으로써 편파적이고 즉흥적인 속성을 가지고 상호 간격과 격차가 생기는 경우를 빈번히 보여준다. 이때 독자는 본문과 제목 간에 분명한 연관성이나 인과성을 찾기 어렵기 때문에 불가해성을 경험하는데, 이 간격 및 격차를 메우는 것은 어떤 희미한 이접성일 뿐이다. 유계영은 시에 제목을 부여하는 데에도 관습적이고 상투적인 언술체계를 이탈하여 비선형적이고 비약적이며 돌발적인 표현 방법을 구사하는 것이다. 유계영의 시는 1차적 제목 부여 방식에 2차적으로 해당 시의 전체적 상황이나 정황을 암시하는 이미지를 중첩시키거나 발화 위상과 기법 및 구조화 원리 등의 미학적 특이성을 함축하는 이미지를 중첩시키는 경우를 종종 보여준다.  
   이 시는 유계영의 기본적인 표현 방식으로서 각 연이 파편적 이미지와 불연속적 서사로 병치되는 듯하지만 1~7연에서 “공원의 한낮”이라는 고정된 공간 및 시간을 중심축으로 다층적 사건을 몽타주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유계영 시는 시적 화자의 시선을 고정점으로 삼아 시간, 공간, 사물, 존재 등의 시적 대상을 파편적 이미지로 분절시킨 후 교차, 중첩, 충돌시키는 몽타주 기법을 구사하는 반면, 이 시는 1연과 4연의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어요”라는 구절에서 보이듯, 화자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하고 시선을 분열시키면서 시적 주체와 대상을 모두 불투명성과 불가해성의 혼돈에 빠트린다. 그런데 이 시가 주체의 시선 대신에 고정점으로 삼는 것은 “공원”이라는 장소와 “한낮”이라는 시간이다.  
   2연에서 “빨강에서 검정까지”라는 구절은 색채적 환유를 통해 사물에 대해, “경사면에서 묘지까지”라는 구절은 장소적 환유를 통해 공간에 대해, “항문에서 시작해 입술까지”라는 구절은 신체 기관적 환유를 통해 존재에 대해 그 다양성을 포괄하면서 전체성을 확보한다.  그리고 이러한 시적 대상의 다양성과 전체성을 모두 “공원”이라는 공간으로 수렴함으로써 고정점으로 삼는다.
   3연에서 “바람이 불자 화분이 넘어”지고 “화분이 산산조각 나는 것을 보고/ 아이가 울음을 터트”리는 장면은 표면적으로 인과율에 근거하는 일련의 사건인 듯하지만, 실제로는 파편적인 이미지와 불연속적인 서사를 병치한 결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1연과 4연에서 제시되는 시적 주체가 모호성을 가지고 분열될 뿐만 아니라 2연에서 “공원”으로 수렴되는 사물, 공간, 존재 들도 실제로는 희미한 연관성을 동반하면서 산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5연의 “빵”-“태양”-“나”-“너”-“비둘기”의 관계도 이와 유사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 연쇄적 의미를 가지는 세 개의 ‘~고’로 연결되는 네 개의 문장은 긴밀한 연관성을 동반하면서 연접되는 듯하지만, 그 내밀한 시적 의미는 존재와 사물들이 모두 상호 무관하게 개별적 행위를 영위하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물, 존재, 사건 들이 표면적인 인과성을 가지고 상호 연관되지만 그 내부에서 이와 대립하는 개별성을 가지고 상호 무관하다는 이율배반성이 이 시의 핵심적인 주제를 이룬다. 그리고 이러한 주제가 시상 전개 과정에서 2연에서 “공원”이라는 공간적 고정점을 통해 한 번 매듭을 형성하고, 6연에서 “공원의 한낮”이라는 공간과 시간이 결합된 고정점을 통해 다시 한 번 매듭을 형성한다. 이 두 번의 매듭을 최종적으로 완결하는 것이 바로 시의 제목인 「온갖 것들의 낮」이다. “층층이 흔들렸다/ 공원의 한낮이 우르르 시작되었다”라는 문장이 작품 전체의 주제를 수렴하고 결집시킨 것이라면 이를 더 응축한 것이 「온갖 것들의 낮」인 셈이다. “층층이 흔들렸다”와 “우르르 시작되었다”가 개별성과 상호 무관성을 함축한다면 “공원의 한낮”은 이것을 희미한 연관성으로 묶어서 공간과 시간이 결합된 고정점을 만드는 기법을 함축한다. “온갖 것들”은 전자를 응축하고 “낮”은 후자를 응축하여 제목으로 삼은 것이다. 여기서 유계영 시의 제목이 작품의 기법이나 구조화 원리의 미학적 특이성을 함축하는 이미지를 중첩하는 경우가 많다는 앞에서의 언급을 재확인할 수 있다.

 

   —계간 《시인수첩》 2022년 여름호, 「유계영 시의 발화, 기법, 구조화 원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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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형엽 / 1994년 《현대시》, 199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등단. 비평집 『신체와 문체』 『주름과 기억』 『환상과 실재』 『알레고리와 숭고』 등. 현재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