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시

기형도의 「물 속의 사막」 해설 - 김 현

공산(空山) 2022. 8. 30. 19:42

   물 속의 사막

   기형도(1960~1989) 

 


   밤 세시, 길 밖으로 모두 흘러간다 나는 금지된다
   장마비 빈 빌딩에 퍼붓는다
   물 위를 읽을 수 없는 문장들이 지나가고
   나는 더 이상 인기척을 내지 않는다

   유리창, 푸른 옥수수잎 흘러내린다
   무정한 옥수수나무…… 나는 천천히 발음해본다
   석탄가루를 뒤집어쓴 흰 개는
   그 해 장마통에 집을 버렸다

   비닐집, 비에 잠겼던 흙탕마다
   잎들은 각오한 듯 무성했지만
   의심이 많은 자의 침묵은 아무것도 통과하지 못한다
   밤 도시의 환한 빌딩은 차디차다

   장마비, 아버지 얼굴 떠내려오신다
   유리창에 잠시 붙어 입을 벌린다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
   우수수 아버지 지워진다, 빗줄기와 몸을 바꾼다

   아버지, 비에 묻는다 내 단단한 각오들은 어디로 갔을까?
   번들거리는 검은 유리창, 와이셔츠 흰빛은 터진다
   미친 듯이 소리친다, 빌딩 속은 악몽조차 젖지 못한다
   물들은 집을 버렸다! 내 눈 속에는 물들이 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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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정적인 세계의 그로테스크 리얼리즘

   김 현

 

 

   이미지만을 뒤따라가자면, 밝은 빌딩의 유리창을 치는 빗줄기는 어릴 적에 본 옥수수 잎과 결부되고, 그것은 아버지의 얼굴과 겹쳐지지만("우수수 아버지 지워진다, 빗줄기와 몸을 바꾼다"는 그 이미지들이 교란되는 순간의 묘사이다. 우수수는 옥수수 때문에 따라 나오고, 빗줄기와 아버지는 정상으로 회귀한다.)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관점에서는 "나는 헛것을 살았다/나는 살아서 헛것이었다"의 집을 버리고 되는 대로 쏟아지는, 그래서 다 없어져버린 '/'의 대립이 더 중요하다. 시인은 집이 없는, 방황하는 시대의 지친 넋이며, 그 원형은 그의 아버지이다. 나는 헛것을 살았다, 아니 살다 보니 나는 헛것이었다. 그런데 그 나는 바로 아버지였다! 그 인식 이후에, 나에겐 눈물도 없다.

   기형도의 리얼리즘의 요체는 현실적인 것(개인적인 것역사적인 것)에서 시적인 것을 이끌어내, 추함으로 아름다움을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시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며, 현실적인 것이 시적이라는 것을, 아니 차라리 시적인 것이란 없고, 있는 것은 현실적인 것뿐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진흙탕에서 황금을 빚어내는 연금술사가 아니라, 진흙탕을 진흙탕이라고 고통스럽게 말하는 현실주의자이다. 그의 시학은 현실적인 것과 시적인 것의 대립 위에 세워져 있지 않다. 그래서 그는 꿈을 꾸지 않는다. 망가진 꿈이라도 꿈을 꾸는 자에겐 희망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는 망가진 꿈도 꿈꾸지 않는다. 망가진 꿈은 그리움의 상태로, 그런 것도 있었지, 라는 쓰디쓴 회상의 상태로 존재할 따름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시는 현실적인 것을 변형시키고 초월시키는 아름다움, 추함과 대립되는 의미의 아름다움을 목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모습에 대한 앎아름다움이란, 아는 대상다웁다라는 뜻이다으로서의 아름다움을 목표한다. 그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소외된 개별자, 썩어가는 육체, 절망 없는 미래(보라, 시인은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오래된 서적]라고 말한다), 헛것인 존재들이다. 그에게 있어, 시적인 것은 따로 없다. 그가 익숙하게 아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며, 시적인 것이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것들이 사실은 얼마나 부정적인 것들인지.

 

 

   ―시집 입 속의 검은 잎(1989) '해설' 물 속의 사막부분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