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시

백무산의 「갈 수 없는 미래」 평설 - 김동원

공산(空山) 2021. 11. 22. 11:18

   갈 수 없는 미래

   백무산

 

 

   서인도제도를 발견한 콜럼버스가 원주민들을

   만났던 때의 감동을 일기장에 이렇게 남겼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다.

   점잖고 살인이나 도둑질을 하지 않으며, 악에 관해서 전혀 모른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고…… 그리고 항상 웃는다.”

 

   그 감동을 스페인 국왕에게 편지에 담아 보냈다

   “그들은 아주 소박하고 정직하고 아낌없이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줍니다.

   그들은 자신보다 타인에 대한 애정이 더 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그들은 훌륭한 노예의 자질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냥개를 풀었고

   금을 가지고 오지 않은 자들의 팔을 자르고

   저항하는 수만 명의 사람들을 죽였다

   노예 없이 문명은 발전할 수 없기에

 

   이 나라 콜럼버스의 후계자들이자

   진보개혁가들은 이런 정책보고서를 작성했다

   “노동자들은 열악한 조건에서도 묵묵히 일하는 진정한

   애국자들입니다

   그들은 존중받아야 합니다.

   존중해서 계속 묵묵히 일하게 해야 합니다.

   빈곤 없이는 국가가 발전할 수 없습니다.”

 

 

   -- 계간 포지션2021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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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는 세상을 드러내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현실을 은폐하고 왜곡한다. 가령 산업전사란 말을 생각해 보자. 사전은 이 말을 가리켜 산업 현장에서 힘껏 일하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그 설명이 현실의 노동자를 제대로 전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 의문을 확인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이병례의 논문 아시아-태평양전쟁기 산업전사이념의 형상화와 재현은 이 말의 기원이 일제 시대로 거슬러 오른다고 알려주고 있다. 산업전사는 노동자를 전사로 명명하면서 국가적 사업에 죽음을 각오하고 생산증강에 나서야 한다는 이념을 설파하기 위해 일제가 만들어낸 말이었다.

   독립한 나라에서 이 말이 다시 등장한 것은 개발독재시대 때였다. 부당한 정권 탈취를 경제 발전으로 희석시키려 했던 군사정권은 노동자를 조국 근대화의 주역으로미화하기 위해 다시 이 말을 소환한다. 논문에서 우리는 산업전사라는 말에 청산하지 못한 일제 시대가 서려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콜럼버스는 우리에게 신대륙의 발견자로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시는 그 사실보다 콜럼버스가 발견한 서인도제도의 사람들에 주목한다. 시는 그곳의 사람들이 사람이 갖추어야 할 인성의 이상향을 실현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렇게 보면 콜럼버스는 인류가 이루어야 할 미래의 꿈을 만난 것이다. 하지만 콜럼버스는 그들에게서 인류의 이상향을 꿈꾼 것이 아니라 훌륭한 노예의 자질을 본다. 노예 없이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살 수 있는 미래의 꿈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곁에 왔었지만 인류는 그 미래를 걷어차 버렸다.

 

   걷어찬 미래의 꿈은 노동자들의 현실에서도 반복된다. 현실의 노동자들은 열악한 조건에서도 묵묵히 일하고 있다. 이제 그들의 성실에 부응하여 노동자를 공정하게 대우하면 세상은 곧바로 이상적인 사회가 된다. 그러나 세상은 그들은 존중받아야한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존중해서 계속 묵묵히 일하게 해야한다고 말한다. “빈곤 없이는 국가가 발전할 수 없다면서 노동자에 대한 지속적 착취를 통해 세상을 굴려가려 한다. 더더욱 슬픈 것은 이러한 입장을 정책보고서에 담은 것이 자본가가 아니라 진보개혁가들이란 점이다. 그들은 누구보다 노동자가 존중받는 세상을 꿈꿔야 할 사람들이다. 시인은 그러한 세상에 대한 미래의 꿈이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성실한 노동자들이 그 꿈의 절반을 이미 세상으로 가져왔으나 세상이 그 꿈의 나머지 절반을 걷어차 버렸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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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원 / 문학평론가. 1988문학과 사회겨울호와서울신문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으로 등단. 번역, 세르비아 작가 밀로라드 파비치의 소설 바람의 안쪽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