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감자의 몸 - 길상호

공산(空山) 2022. 8. 24. 06:48

   감자의 몸
   길상호


   감자를 깎다 보면 칼이 비켜가는
   움푹한 웅덩이와 만난다
   그곳이 감자가 세상을 만난 흔적이다
   그 홈에 몸 맞췄을 돌멩이의 기억을
   감자는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벼랑의 억센 뿌리들처럼 마음 단단히 먹으면
   돌 하나 깨부수는 것 어렵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뜨거운 夏至의 태양에 잎 시들면서도
   작은 돌 하나도 생명이라는
   뿌리의 그 마음 마르지 않았다
   세상 어떤 자리도 빌려서 살아가는 것일 뿐
   자신의 소유는 없다는 것을 감자의 몸은
   어두운 땅 속에서 깨달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 웅덩이 속에
   씨눈이 하나 옹글게 맺혀 있다
   다시 세상에 탯줄 될 씨눈이
   옛 기억을 간직한 배꼽처럼 불거져 있다
   모르는 사람들은 독을 가득 품은 것들이라고
   시퍼런 칼날을 들이댈 것이다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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