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세탁실 창가에 있는 난 화분에 물을 주고 있는데 창밖에서 '구우' 하며 우는 비둘기의 음성이 들려왔다. 단 한 번의 낮디낮은 음성이었지만 나는 퍼뜩 짚이는 데가 있어 세탁기 옆의 에어컨 실외기쪽 창문을 열고 내려다 보니 비둘기 한 마리가 그곳 바닥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905호의 실외기 밑에 비둘기가 둥지를 튼 것 같으니 비둘기를 쫓아 달라는 아파트 관리실의 전화를 받고 둥지를 치워버린 것은 지난 봄이었다. 그러고는 까맣게 잊어 버리고 있었는데, 어느새 다시 와서 여기서 지금까지 살고 있었던 모양이다. 실외기 아래엔 배설물이 수북이 쌓여 있었고 악취도 났다.
나는 우선 고함을 치며 세탁실용 고무장갑을 마구 흔들어 '유해야생동물'인 비둘기를 쫓았다. 그러나 비둘기는 저녁에도 이튿날 새벽에도 다시 와 있었고 나는 그때마다 대걸레 자루까지 동원해 가며 비둘기를 쫓았다. 그랬더니 그날 저녁부터는 비둘기가 보이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이제 배설물 청소만 하면 되겠구나 싶어 한숨 돌리고 바닥 상태를 살펴보고 있는데, 이게 웬일인가!
비둘기 새끼 두 마리가 벽쪽에 바짝 붙어 웅크리고 있지 않은가! 아직 날지는 못했지만 깃털은 거의 다 자라 있었다. 편애를 받았는지 욕심이 많았는지 한 마리는 덩치가 어미 만했지만, 다른 한 마리는 더 작아 보였다. 내가 비좁은 세탁실에서 어미만 쫓는데 몰두하다가 새끼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가을이라서 여태 새끼를 키우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새끼들은 굶고 놀라서 그런지 기진맥진해 있었다. 나는 먹다 남은 삶은 단호박과 밤을 잘게 부수어 새끼들에게 던저 주었지만 거들떠보지 않았다. 하긴 물이 없는 저 메마른 시멘트 바닥에서 산다는 것은 오직 어미가 물고 온, 어미의 입 속에서 나온 먹이만을 먹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터였다.
나는 사려깊지 못하고 경솔한 나의 행동이 원망스러워졌다. 새끼들이 있는지 왜 미리 찬찬히 살펴보지 못했을까. 새끼가 있는 줄 알았더라면 그 새끼가 다 자라 날아간 후에 비둘기 퇴치 방법을 찾아도 되었을 텐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저지른 일 중에서 최대의 실수이자 죄라고 생각되었다. 어디 가서 이 부끄럽고 아픈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인가. 저 새끼들이 어미만을 기다리다가 굶어 죽고 만다면 나는 두고두고 가슴에 못을 박고 살아야만 할 것이다. 그 정도의 놀람으로 어미새가 새끼를 두고 돌아오지 않을 리가 없다며 아내는 자책하는 나를 위로했지만, 나는 지난밤에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미 새가 사라진 지 이틀째 되는 오늘 아침 내가 창문을 열었을 때, 거기엔 기적이 일어나 있었다. 에어컨 실외기 위에 앉아 있던 비둘기 두 마리가 푸드득 날아갔던 것이다. 새끼들은 바닥의 그 자리에서 어제보다 훨씬 생기있는 모습으로, 경계하는 눈빛으로, 아니 원망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창문을 가만히 닫으며 비둘기들에게 다시 와 줘서 고맙다고, 정말 미안했다고 인사를 했다.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로부터 보름쯤 지났을 때, 새끼 비둘기들은 다 자라서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낮에는 밖으로 날아 나갔다가 가끔 돌아와서 쉴 때가 있을 뿐이었고, 밤에는 어미와 새끼가 모두 돌아와 실외기 밑에서 자고 있는 것이 관찰되었다. 나는 이제 귀소 본능이 강한 비둘기를 그냥 혼내 주기만으로는 쫓아낼 수가 없고 실외기실 전체를 그물로 덮어씌우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자루를 길게 연장한 국자로 아내가 비둘기 배설물을 청소하는 동안 나는 헌 커튼 봉을 실외기실의 양쪽 벽 사이의 간격에 맞게 잘라 끼우고 미리 구해둔 그물로 덮어씌웠다. 실외기 앞(바깥쪽)의 아래쪽은 공간이 좁아서 사람이 들어가 그물을 고정하기가 어려우므로 다른 커튼 봉에다 그물의 끝을 감아 '케이블타이'로 고정한 다음 그 커튼 봉을 아래로 늘어뜨리는 방법으로 작업을 했다. 벽과 그물 사이의 벌어진 틈으로 비둘기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다른 각목을 사용하여 그 틈을 메꾸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실외기실 양쪽 벽 사이의 거리보다 그물의 폭이 좁으면 안 되고 넉넉한 것이 좋다.) 그리고 주름호스로 만든, 텃밭에서 조류 퇴치용으로 사용하던 가짜 구렁이도 한 마리 창가에다 걸어 두어 얼비치는 그 그림자에 비둘기가 겁을 먹도록 하였다.
이제 문제는 해결되었다. 비둘기들은 몇 번 날아와서 공중 선회를 하다가 되돌아가곤 하더니 그 후로는 정말 얼씬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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