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 일기

하늘정원과 비로봉 탐방

공산(空山) 2021. 7. 30. 20:39

한더위를 피해 그제부터 아내와 함께 산가에 머물고 있다. 농사철에 접어들고부터 이틀에 한 번씩은 산가에 왔었지만, 텃밭일을 하고는 저녁에 아파트로 돌아가곤 했다. 오랫동안 아파트 생활에 길들여져서 고향집이 어딘가 불편했던 것이다. 겨울엔 춥고 여름엔 습도가 높아서 끈적끈적한 느낌이 든다. 현관문을 열고 한 걸음만 나가면 낮에도 기다렸다는 듯이 산모기가 달려든다. 인터넷이 없는 것도 여간 불편한 점이 아니다. 물론 생각해 보면 이곳에서의 생활이 좋은 점도 많다. 시내에선 연일 낮 최고기온이 35도를 웃돌지만 여기선 웬만해선 31도를 넘지 않는다. 밤엔 해발 1,192m 고지에서 찬 기운이 계곡을 타고 내려오기 때문에 겹이불을 덮고 자야 할 정도다. 이곳에서 밤하늘을 쳐다보면 아직도 예전의 그 별들이 총총하다. 풀벌레와 산새들의 울음 소리, 개울물 소리가 밤새도록 들려와서 옛 생각에 아득히 잠겨 볼 수도 있다. 무엇보다 새벽에 일어나서 해가 뜨기 전까지 시원할 때 텃밭의 일을 할 수 있어서 좋다. 그래서 어제와 오늘 이른 아침엔 묵밭의 풀을 예초기로 베었다. 지난 초여름에 한번 베었는데도 그새 풀이 내 허리 높이만큼 자랐다.

오늘 낮에는 더워서 텃밭에 나가지 않았다. 코로나 때문에 무관중으로 진행되고 있는, 도오쿄 올림픽을 중계하는 TV만 보다가 점심을 먹은 후, 아내와 나는 드라이브를 겸하여 말로만 듣던 '하늘정원'에 한번 가 보기로 했다. 하늘정원은 근년(2017년)에 팔공산 비로봉 뒷쪽에 조성되어 시민들에게 개방된 곳이다. 오래전부터 군위군 쪽에서 그곳까지 오르는 군사도로가 있었지만 민간인 통행이 금지되어 오다가 근년에 비로봉에 이어 개방된 것이다. 30년쯤 전에 내가 영천 치산계곡을 따라 진불암을 지나 동봉으로 탐사를 하며 오를 때, 그 가파른 화강암 바닥의 개울길을 '하늘로 오르는 계단'이라고 이름붙인 적이 있었다. 하늘정원이라는 말이 가슴 설레던 그때를 생각나게 했다.

차는 긴 팔공산터널을 통과하여 동산계곡으로 접어들었다. 동산계곡은 예전에 아들들이 어릴 때 친구들의 가족과 함께 와서 하루 놀다 간 곳이다. 굽이굽이 시멘트 포장 도로를 따라 올라가자니 혹시 하늘정원에 주차할 곳이 없을까 불안해졌다. 내려오는 차를 세워 물어봤더니, 오늘은 주차 공간이 충분하더라는 대답이었다. 생각보다는 가파르지 않은 길이었고 금방 하늘정원 주차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주차장은 그다지 넓지 않아 열댓 대의 차량이 주차할 수 있을 정도였다. 주차장에서 길고 완만한 데크 계단을 올라가니 거기에 널찍한 정원이 있었다. 주능선 바로 뒷쪽에 이렇게 펑퍼짐한 지형이 있었다니! 군위군에서 설치한 삼국유사 조형물과 정자가 있었으나 하늘정원은 황량하고 썰렁한 느낌이었다. 한쪽에서는 스피커에서 군사시설에 대한 사진촬영을 하지 말라는 말이 계속 흘러나왔다. 저절로 자란 마타리와 원추리, 참나리꽃이 몇 군데 피어 있었지만, 딴데서 좋은 흙을 갖다 부어서라도 야생화를 좀 많이 가꾸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아내와 나는 하늘정원에서 비로봉으로 이어지는 길을 걸었다. 예까지 와서 고향이 내려다 보이는 비로봉을 올라보지 읺을 수가 있겠는가. 비로봉은 많이 멀지도 않았고 가파르지도 않았다. 최근에 그래 왔듯이 여기서도 나의 가장 큰 관심거리는 떡갈나무였다. 하지만 저 아래쪽보다 키와 잎의 크기가 작아진 신갈나무만 길가에 많았을 뿐 떡갈나무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그 나무는 산 중턱에서만 자생하고 이렇게 높은 곳은 좋아하지 않는가 보았다. 하긴 낮은 산에서도 많이 보지는 못했지만... 그 대신 오랜만에 보는 나무와 꽃들이 길가에 많아서 반가웠다. 팔공산 남쪽 비탈에선 이미 오래전에 자취를 감춘 동자꽃이 이곳 북쪽 비탈에선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그밖에 예전에 본 적은 있지만 이름마저 잊고 있었던 미역줄나무와 참빗살나무, 수리취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도 저 비로봉 너머 남쪽 비탈에서처럼 사람들의 발길이 잦게 되면 저 야생화들도 하나둘 자취를 감추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벌써 사진을 찍느라고 군락지에 들어가 난장판을 낸 곳도 있었다.

군사시설에 갇혀 있다가 2009년도에야 개방된 비로봉. 높다란 송신탑 옆에 초라해 보이지만 우뚝 선 바위엔 페인트 글씨로 높이가 1,193m로 표시되어 있었다. 정확한 높이는 1,192.3m다. 비로봉 부근에는 열 살은 넘어 보이는 주목이 여남은 그루 서 있었는데, 아마도 수 년 전에 인공조림을 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하늘정원 쪽이나 다른 봉우리에도 자생하지 않는 주목이나 구상나무 같은 고산지대 수종을 심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비로봉 주변에 여러 개 난립해 있는 송신탑과 군사시설들도 정비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논의가 시작되고 있는 도립공원 팔공산의 국립공원 승격은, 지방자치단체나 국토교통부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것이 아니라, 저 아래쪽 산언저리에 평화롭게 살고 있는 주민들의 의견을 제대로 수렴하고, 그들의 생활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주차장으로 내려오는 길목에는 '원효굴'과 '오도암'이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이정표가 서 있었다. 등성이에서 내려다본, 오도암으로 내려가는 수직적인 가파른 길은 수 년 전에 가 보았던 중국 황산의 '서해대협곡'을 떠올리게 했다. 시간이 너무 늦어 오도암과 원효굴은 다음에 다시 와서 들르기로 하고, 엔진 브레이크를 사용하며 천천히 산을 내려왔다. 그리고 효령면 거매리까지 가서 메기매운탕으로 저녁을 먹고 어스름에 산가로 돌아왔다. 오늘 하늘정원과 비로봉을 둘러보며 걸은 걸음은 7,500보 정도로, 그리 많지 않았다.

하늘정원 주차장의 안내판
주차장에 서 있는 이정표
하늘정원으로 오르는 계단
떡갈나무는 없고 신갈나무가 많았다.
참빗살나무
미역줄나무
오랜만에 만난 동자꽃
동자꽃 군락
산수국
기린초
수리취
마타리
헬기장 부근의 마가목들
황량한 하늘정원
하늘정원에서 바라본 비로봉
가운데가 비로봉, 왼쪽의 먼 산이 동봉, 오른쪽이 삼성봉(서봉)이다.
비로봉의 주목들
비로봉, 자연 상태의 바위가 표지석이 되어 있다.
비로봉에서 내려다본 고향
서쪽 능선들
원효굴과 오도암은 다음 기회에 찾아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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