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시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 평설 - 권혁웅

공산(空山) 2021. 5. 31. 07:25

   입 속의 검은 잎

   기형도

 

 

   택시 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 그의 어린 아들은

   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

   택시 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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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 속의 검은 잎」은 의외로 조명을 받지 못한 작품이다.

   “그”의 죽음 때문에 이 시를 10•26에서 5•18에 이르는 격변의 시기를 형상화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2연을 보면 그렇게 보기 어렵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이때와 장소가 ‘광주’를 지시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이 시행은 ‘광주민주화운동이 터졌을 때 나는 그곳에 없었다’로 간추려질 수 있다. “먼 지방”/“먼지의 방”이라는 소리은유는 책이나 읽고 있던 내 행동이 떳떳하지 못했거나 무지의 소산이었음을 암시한다.

   반면 “그”는 나와 달리, 광주의 참상에 대해 목 놓아 외쳤으며(“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그 때문에 죽임을 당한 사람이다.* 따라서 그는 윤상원에서 시작하여 박종철로 이어지는 수많은 민주화운동의 계보에 든 인물이다. “그”라는 불특정한 이름은 익명성을 강화한다기보다는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이들을 지시하는 일종의 제유로 기능한다. 따라서 그는 수많은 이들로 모습을 바꾸어 나타날 것이다. 과연 나는 돌아본 “택시 운전사”의 얼굴에서 그를 다시 발견한다.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저 공포는 죽음의 얼굴을 대면한 데서 오는 공포가 아니다. 이미 죽음이 겹으로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장례식 행렬을 가득 메운 만장(“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과 아무것도 발설하지 못한 내 혀(“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가 그것이다.

   이 많은 죽음 가운데 “그”는 면면히 살아있지 않은가? 저 공포를 죽은 그가 수많은 민중에게서 부활하고 있다는 탄성으로, 곧 반어로 읽을 필요가 있다. “그”는 광주에 연루되어 죽었으나, 내가 “가까운 지방” 혹은 “처음 지나는 벌판”에서 마주친 수많은 장삼이사들의 얼굴에서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저 무서운 생명력이 내 말하지 못함, 무력함을 자극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이 시의 공포와 두려움은 염세적이거나 절망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반성적인 것이다.

 

   *“그의 어린 아들”은 잘 알려진 바, 아버지(조사천 씨)의 영정을 든 천진한 아이(조천호 군, 당시 5세)의 사진에서 도출된 이미지인 듯하다.

 

   권혁웅 / 시인, 문학평론가

   -- 계간 《시로 여는 세상》 2021년 봄호, 기형도와 1980년대(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