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시

김경인의 「그레텔」 평설 - 김효은

공산(空山) 2021. 6. 4. 21:38

   그레텔

   김경인

 

 

   숲에 갔다

 

   아버지가

   하룻밤 내내 만들어준

   흰 빵을 찢어 버리면서

   검은 돌처럼 구르면서

 

   나뭇가지처럼 뻗어가는 길과

   나를 안고 달리다가 쓰러진 길이

   안 보일 때까지

 

   무너지지 않는 집을

   크래커인 양 이빨로 부스러뜨리면서

   짙은 어둠으로 만든 지붕을

   다크초콜릿처럼 핥으면서

 

   집으로 가는 길을 영영 잊어버릴 때까지

 

   내 속에서 꺼낸 낯익은 얼굴 하나

   푹 고아서 흐물흐물 사라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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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레텔을 위하여

   김효은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서두

 

   일찍이 톨스토이가 그의 명작 『안나 카레니나』 첫 문장에서 말한 바 있지만, 가족 서사란 대개가 그런 것이다. 가족을 지속공동체로 봤을 때, 불행이라는 위험 인자를 안고 있지 않은 가정은 적어도 필자가 아는 세상에는 없다.

 

    (…) 『헨젤과 그레텔』은 우리가 친숙하게 잘 아는 대표적인 가족 서사 이야기. 마녀의 이야기가 희석되어 있지만, 기본 서사는 아버지와 아이들 그리고 계모를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다. 후처의 등쌀에 못 이겨 친자식 둘을 데리고 길을 나서는 무능력한 가장은 예나 지금이나 다수 존재한다. 나아가 지금 동시대 뉴스 기사를 접하다 보면 꼭 계모만이 악역을 혼자서 전담하는 것은 아니며, 간혹 친부와 친모가 오히려 더 능동적으로 잔인하게 아이들을 학대하고 감금하고 방치해서 죽게 하는 사건들도 비일비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서 받는 고통은 내면화, 순응화되기 쉽다. 피할 수 없는 태생적 환경이기 때문에, 미성숫한 개체로서의 인간은 그를 벗어나, 다른 환경에서 다른 생존을 보장받기가 또한 쉽지 않다. 그러나 성숙과 성장은 어쩌면 그 가족, 지옥을 떠나는 것만으로 이미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꼭 동화가 아니더라도 다른 세계로 진입은, 첫 이니시에이션의 관문이 된다. 비단 인간만이 아닌, 동물이나 괴물들이 사는 환상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 가장 낯익은 얼굴, 가장 익숙한 나, 가장 믿었던 친구, 혈연이라 부르던 관계들 등등 혈연과 지연과 학연의 곁가지로 자라난 무성한 잔디인지 잡초인지 모를 그러한 무분별한 관계들을 모조리 싹둑싹둑 끊어내고 쳐내고 “피”를 뽑아내듯, 모든 배경들을 지워내고 내가 오롯하게 낯선 곳에서 ‘나’의 결정체로서만 순수하게 남겨질 때, 그때 비로소 어쩌면 ‘나’는 진정한 어른 진정한 ‘나’가 되는 것이 아닐까.

 

   인어의 꿈은 왕자의 아내가 아니라 인간 그 자체여야 한다. 두 다리를 얻어 몸을 곧게 세우고 자신 있게 내 길을 걸어 나갈 때, 어떤 대상에도 의존하거나 기대이지 않은 채, 타협이나 희생도 없이, 내가 가고 싶은 길을 선택해서 그 길을 당당하게 걸어갈 때 ‘나’는 ‘나’로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지나온 배경들, 모든 후회들을 지우고 현재의 나의 길에 충실하고 도저하게 서서 펼쳐진 미래를 응시하고 굳세게 걸어 나갈 때, 나는 비로소 하나의 독립 주체로 서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집으로 가는 길을‘ 온전하게 ”영영 잊어버릴 때까지“ 우리는 망각과 재도약을 위해 노력하면서, 눈앞에 펼쳐진 그 숲길을 줄기차게 걸어 나가야만 할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나를 찾아 되찾아가기 위해서는 기존의 나를 내가 살해하는 상징적 죽음과 부활과 거듭남의 통과제의가 필요하고 우리는 그 미션들을 차근차근 완수해 나가야 할 것이다.

 

   기꺼이 나 자신을 죽이기, 상징적인 가족 살해와 분리와 독립 그리고 홀로서기와 길 떠나기를 감행해야 한다. ”내 속에서 꺼낸 낯익은 얼굴 하나“를 ”푹 고아서 흐물흐물 사라질 때까지“ 몰살시켜 버리기. 마녀의 오븐을 리모델링해서 새로이 확장해서 나만의 작업실을 만들기. 괴롭고 힘들었던 지난날의 나 자신을 전부 밀어 넣고 과자로 구워버리고 아삭바삭 ”크래커인 양 이빨로 부서뜨리면서“ 집어삼키고서 그 힘으로 새 삶을 주체적으로 독립적으로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환멸이란 환멸은 모조리 과자로 구워버린다면, 세상의 모든 가족공동체가 차라리 없어진다면, 그래서 학대받거나 죽어 나가는 아이들 나아가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는 아이들이 모두 없어진다면, 차라리 제도상 그게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생각을 해본다. 김경인, 그녀의 시 「그레텔」을 읽으면서, 세상의 모든 그레텔들을 떠올리면서.

 

   위의 시 「그레텔」에는 헨젤이 등장하지 않는다. 새엄마도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딸을 버리기 위해 숲으로 가는 아버지와 그의 딸인 그레텔만이 등장한다. 헨젤도 새엄마도 마녀도 등장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떠남의 서사. “무너지지 않는 집을” “크래커인 양 이빨로 부스러뜨리면서” 온전히 잊고 지워버리고 다시 시작하는 삶만이 그녀 앞에 펼쳐져 있을 뿐이다. 이 텍스트의 첫 행, 첫 문장은 능동형의 문장인 “숲에 갔다”이다. 숲으로 가게 된 수동적, 피동적 진술이나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 오직 그레텔의 입장에서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진술과 행위, 상황으로만 묘사된다. 숲으로 간 주체는 아버지가 아니라 “그레텔” 자신이다. 아버지는 아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는 객체의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그레텔은 다르다. 그녀는 모든 상황을 이미 알고 있었고 스스로 결정해서 떠남과 이행(移行)을 실행에 옮긴다. 숲으로 가기 전에 계모와 아버지로부터 도망치거나, 거역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겠지만, 그녀는 자발적으로 숲으로 가까이 간다.

 

   “아버지가/ 하룻밤 내내 만들어준/ 흰 빵을” 먹지도 않고 “찢어버리면서”, 새들에게나 먹이로 줘버리고, “검은 돌처럼 구르면서” 다만 더 깊고 깊은 숲으로 자발적으로 들어갈 따름이다. 이것은 그녀의 성장 서사이다. 그녀가 살던 집을 버리고 부서뜨리고, “집으로 가는 길”마저도 “영영 잊어버리”기 위해 감행하는 일종의 탈출과 성장의 이니시에이션인 것이다. “내 속에서 꺼낸 낯익은 얼굴 하나”, 피의 서사는 이제 그녀에게 불필요하다. 아버지의 것도, 죽은 생모의 것도 아닌, 바로 나 스스로가 빚어가는 나 자신의 얼굴, “푹 고아서 흐물흐물 사라질 때까지” 내가 나를 망각의 숲으로 데려가서 기성의 나를 지우고 놓아버리고 새로운 ‘나’로 돌아오기. 자 그렇다면 이제 굴 속의 토끼, 그들의 성가신 딸이 아닌, 그레텔 자신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 계간 《시로 여는 세상》 2021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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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효은 / 시인, 문학평론가. 1979년 목포 출생. 2004년〈광주일보〉신춘문예 시 당선. 2010년 계간《시에》 평론 당선. 서강대 국문학과 박사과정 졸업. 저서『아리아드네의 비평』『비익조의 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