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는 약속을 지켰다
윤제림
“… 자리 잡으면 연락할게”
먼 길 떠나는 사람들이 곧잘 던지고 가는
이 약속은 잘 지켜지지 않는다
영 소식이 없으면 아직도 자리를 못 잡았거나
아주 잊어버린 까닭이라 생각하자
제법 잘 지켜지는 약속도 있다
“… 먼저 가보고 좋으면 부를게”
삼 년 전에 저세상으로 간 언니가
자꾸 부른다며, 엄마가 먼 길을 갔다
혼자 갈 수 있다며
언니가 마중 나오기로 했다며
언니 집을 찾아갔다
이모는 약속을 지켰다,
좋으니까
불렀을 것이다
― 『문학청춘』, 2021.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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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는 약속을 지켰다’의 문학적 미덕을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첫째, 내용이 쉽다는 것이다. 난해성이 현대시의 특성처럼 여겨지는 시대에 일반 독자들에게는 ‘쉬운 시’가 어떤 면에서는 미덕이 된다. 이 시는 쉬운 언어 사용으로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서정적 자아의 간절하고 진실한 명복 기원의 애틋한 자력을 이룬다.
둘째, 자칫 비예술적으로 비칠 수 있는 평이성 속에서도 분명한 시적 변용을 만들어 내고 있다. ‘저세상’을 ‘언니 집’으로 바꾸고 ‘혼자 갈 수 있다’, ‘마중 나오기로’, ‘약속을 지켰다’ 등으로 확장하여 형상화했다. 어렵지 않은 변용이지만 뭔가 깊은 생각으로 끌고 가는 능숙하고 예리한 언어감각이 아닐 수 없다.
셋째, 구체적인 삶의 스토리가 들어 있다는 점이다. 시라는 것이 서정 장르라지만, 그것은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우러나야 약효가 있는 어떤 것이 된다. 문학은 본질적으로 인간학의 어떤 지점에 있기에 그러하리라.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구체적 사건과 이것이 이모의 죽음과 관련해서 일으키는 어떤 긴장이 약발의 효험을 촉진한다.
넷째는 의도적인 대조적 구성을 통하여 흥미의 농도를 고조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깊은 의미와 연결되어 있다. “… 자리 잡으면 연락할게”와 “… 먼저 가보고 좋으면 부를게”의 대비를 말하는 거다. 그것은 이승과 저승의 대조이다. 이승의 삶은 확정적인 것이 아니지만, 저승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틀림없이 지켜진다는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존재적 한계성을 예리하게 반문하고 있다.
쉬우면서도 깊이를 유지하며 말하는 것을, 나는 능숙하거나 원숙한 말하기라고 생각한다. (서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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