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시

이규리의 「낮달」해설 - 권순진

공산(空山) 2021. 3. 23. 10:33

   낮달

   이규리

 

   무슨 단체 모임같이 수런대는 곳에서

   맨 구석 자리에 앉아 보일 듯 말 듯

   몇 번 웃고 마는 사람처럼

   예식장에서 주례가 벗어놓고 간

   흰 면장갑이거나

   그 포개진 면에 잠시 머무는

   미지근한 체온 같다 할까

   또는, 옷장 속

   슬쩍 일별만 할 뿐 입지 않는 옷들이나

   그 옷 사이 근근이 남아 있는

   희미한 나프탈렌 냄새라 할까

   어떻든

   단체 사진 속 맨 뒷줄에서

   얼굴 다 가려진 채

   정수리와 어깨로만 파악되는

   긴가민가한 이름이어도 좋겠다

   있는가 하면 없고, 없는가 하면 있는

   오래된 흰죽 같은,

 

 

   -- 시집『뒷모습』(랜덤하우스코리아,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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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스로는 빛을 내지 못하고 태양빛을 반사해서 우리 눈에 환하게 보이는 것이 달입니다. 햇빛 때문에 우리가 알아채지 못해 잘 보이지 않을 뿐 달은 언제나 하늘에 떠 있습니다. 아침에 해가 뜨듯 달도 어두워서야 뜨는 걸로 아는 사람이 드물게 있는데 물론 과학적 진실이 아니지요. 낮달은 햇빛에 가려 유심히 쳐다보지 않으면 안 보입니다. ‘햇님이 쓰다 버린 쪽박’이라 그런지, ‘신다 버린 신짝’이기 때문인지 존재감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정록 시인은 ‘심심한 사랑방 막걸리 자국 희미한 소가죽 북’같다고 하더군요.

   한낮에 우연히 눈에 띈 그 달처럼 ‘무슨 단체 모임같이 수런대는 곳에서’ ‘맨 구석 자리에 앉아 보일 듯 말 듯’ ‘몇 번 웃고 마는 사람처럼’ 있는 듯 없는 듯 흐릿하게 인식되는 존재가 있습니다. 나도 굳이 분류하자면 그런 측에 속하지요. 튀거나 나대는 것에 애당초 소질이 없을뿐더러 주역으로 나서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성격 탓일 겝니다. 그러다 보니 늘 비주류가 되고 나도 모르는 새 저만치 밀려나 있어 낮달 신세가 되고 말지요. 가끔 남의 시선이 두렵고 자신감 없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이유일 것입니다.

   시인은 그런 낮달의 존재를 ‘예식장에서 주례가 벗어놓고 간 흰 면장갑이거나 그 포개진 면에 잠시 머무는 미지근한 체온’으로, ‘옷장 속 슬쩍 일별만 할 뿐 입지 않는 옷들이나 그 옷 사이 근근이 남아 있는 희미한 나프탈렌 냄새’로, ‘단체 사진 속 맨 뒷줄에서 얼굴 다 가려진 채 정수리와 어깨로만 파악되는 긴가민가한 이름’으로 기가 막히게 비유하면서 따뜻한 연민의 감정을 섞어 비호하고 있지만, 가열찬 이 경쟁사회를 살아가는데 ‘있는가 하면 없고, 없는가 하면 있는 오래된 흰죽 같은’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마땅할 리가 없겠지요.

   어두운 밤하늘을 배경으로 떠오른 선명한 밤 시간의 달이 자기 존재를 또렷하게 각인 시킨다면, 낮달은 마치 희미하게 숨어있는 존재와 같습니다. 배경이 돋보이지 않는 낮달의 존재는 마치 불우한 시간을 타고난 우울하고 외로운 영혼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장자에 나오는 ‘발을 잊는 것은 신발이 꼭 맞기 때문’이고 ‘허리를 잊는 것은 허리띠가 꼭 맞기 때문’이란 말이 있듯이 조직 안에서 쓰다 달다 군소리 한마디 없이 신발을 신었는지 안 신었는지 누구도 의식하지 못한 채 조용히 지내는 사람 또한 낮달 같은 존재입니다.

   등에 업은 아기가 계속 보채면 달래고 어르느라 정신없지만 아기가 조용히 업혀 있으면 업혀 있는지도 몰라 ‘업은 아기 삼년 찾는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잊고 편안히 지낸다는 거지요. 그 경우 내 존재를 상대에게 끊임없이 인정받으려 하기보다는 내가 상대에게 스며들어 있는 듯 없는 듯 해사한 은빛 얼굴의 낮달이어도 무방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고보니 문인수 시인의 시를 비롯해 어머니를 낮달에 비유한 시도 몇 편 본 것 같습니다. / 권순진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