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시

이제니의 「너는 멈춘다」 평설 - 임현준

공산(空山) 2021. 3. 23. 10:17

   너는 멈춘다

   이제니

 

 

   너는 멈춘다. 횡단보도 앞에서. 철 지난 시계탑 앞에서. 사라져가는 계절의 마음 앞에서. 너는 멈춘다. 수정할 수도 있었던 틀린 맞춤법과 건너 뛸 수도 있었던 띄어쓰기와 다시 되돌아오는 긴 한숨 앞에서. 너는 멈춘다. 지나간 복도는 침울하고.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어둠을 가리키고 있고. 선택지 없는 방향성만을 제시하고 있고. 계절은 바뀐다. 계절이 바뀌듯 지나간 마음도 바뀐다. 지나간 마음을 바꾸면 조금은 더 살아갈 수 있습니다. 너는 멈춘다. 지나간 여름의 이파리들 앞에서. 쓸모를 찾아가는 사물들 곁에서. 탁자는 비어 있다. 저녁 해가 기울어가며 만들어내는 그림자 그림자들. 오래 전에 들었던 가슴 아픈 이야기 하나가 떠오른다. 쓸모없음을 상기시키는 어두운 도형 하나가 문득 제 그림자를 바꾼다. 너는 다시 멈추어 선다. 그러니까 어제 너는 불 꺼진 병실 침대 위에 누워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늘 이 아침에 너는 빛이 쏟아져 내리는 횡단보도 앞에 멈추어 서 있다. 너를 멈추어 서게 하는 힘. 너를 멈추는 것으로 다시 살아가게 하는 힘. 너무 많은 빛이 네 눈동자 속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너는 마른세수를 하듯 두 손 가득 빛 그물을 떠서 얼굴을 문지른다. 오래 전 두고 온 어둠이 사방으로 번지고 있었고. 열리지 않는 창문 너머로 새로운 빛이 내려앉는다고 생각할 때. 바라보지 않으면서 바라보는 눈을 가진 고양이들처럼 거리거리마다 관대한 사람들이 걸어가고. 삭제되지 않는 방식으로 삭제되는 어제의 문장들. 한 줄 두 줄 써내려간 문장들 위로 부드럽게 붉은 줄이 그어질 때. 등지고 누웠던 너의 뒤편으로 어제의 신음소리 다시 들려오고. 이제 너는 비로소 너 자신이 되었으므로. 처음으로 너는 한 발 제대로 멈추어 선다. 비로소 너는 사람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애지》 2020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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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의 힘, 멈추어 서서 흘러가기

   임현준

 

 

   말은 허상(虛像)이다. 그러면서도 여기저기에 있어서, ‘가슴 아픈 이야기 하나가 떠’올라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선 ‘너’를 별안간 차도로 밀어버릴 수도 있다. 딴에는 ‘사라져가는 계절의 마음 앞’에 멈춰 선 ‘너’에게 쏟아지는 따스한 아침 햇살처럼 ‘다시 살아가게’ 안아줄 수도 있다. 존재하지 않으나 무소부재한 것이 말이니, 동서양을 막론하고 빛이니 칼이니 빵이니 하는 비유로 말의 힘을 자각하려 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인간사 지혜였을 것이다.

 

   말의 무소부재한 힘을 휘두르거나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일을 업으로 삼는 이들이 시인이다. 물론 시인이 행사하는 말의 성분에는, 특히 현대서정시에 적을 둔 시인의 말에는 살아있는 이미지와 돌연한 상상력이 적절한 비율로 함유되어 있어야 한다. 게다가 삶의 편린이 추상적이지 않게 혹은 일방적이지 않게 소소한 울림으로 표상되어야 한다. 그것은 성인의 말과 같이 혹은 철학자의 말과 같이 진실되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시인의 말은 성직자의 말이나 철학자의 말과는 달라야 한다. 종교에 귀의한 자의 말은 경전에 적힌 신의 말을 훼손 없이 전하는 언행일치의 말일 것이고, 철인의 말은 세상의 형이상과 형이하의 감각을 논리로 꿰는 추상적인 말일 것이다. 그러나 시인의 말은 온몸으로 쓰면서도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빈 오지그릇이어야 한다. 하늘의 마땅한 이치를 일상의 비근한 정서로 끌어내리는 직관적인 사물이어야 한다. 무엇을 담든지 시를 읽는 이의 식욕에 해석을 맡기는 것이 시의 말이요, 멈춰 선 횡단보도 앞에서 ‘너’보다 먼저 아스팔트에 누워 차에 치이는 그림자를 보고 마음이 온통 찢어지는 게 시의 말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제니 시인의 말, 「너는 멈춘다」는 힘이 세다. 그의 시는 언어와 상상과 이미지가 각각의 결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한 몸처럼 나아간다. 그러면서도 읽는 이의 사유가 미치는 데까지 제각각 해석을 하도록 내버려 둔다. 더불어 일상의 세목을 엮어 우리가 놓치기 쉬운 감각의 정서를 뿌리째 흔들어 놓는다. 흔히 이제니의 시를 자동발화적 상상력이라 일컫는데, 사실 그의 시들은 정서라는 씨줄과 논리라는 날줄이 치밀하게 직조되어 이음새가 구분되지 않는 매우 정교한 직물로 보는 게 더 합당할 듯하다. 시어의 쓰임이 처음부터 끝까지 적절히 배치되어 있으면서도 자유로운 상상력 안에서 유영하고 있고, 시적 시선이 세부에서 전체로 전체에서 내면의 세부로 자유자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자유자재의 서정을 읽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연습이 필요하다는 점에 있다. 다시 말해 독자들이 이제니의 동적인 시에 탑승하기 위해서는 멈춤의 시선 또는 정적인 시선으로 시를 읽어야 하는 수고로움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번 <애지가 선정한 이 한 편의 시>에 선정된 「너는 멈춘다」는 이제니 시인의 ‘이제니 시 읽기 방법’에 관한 독시법이기도 할 것이다. ‘너는 멈춘다’, ‘멈추어 선다’와 같은 시구가 주술처럼 반복되는 것도 그러하거니와, ‘너는 멈춘다’로 시작하여 ‘비로소 너는 사람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로 끝맺는 논리적 비약이 시 자체의 독시 방법으로 읽히는 까닭이다.

 

   물론 그것만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너는 멈춘다」는 시의성 측면에서 이 시대의 무자비한 속도성을 비판하고 있기도 하고, 불가피하게 벌어지고 있는 팬데믹 상황에서 우리에게 던져지는 위안일 수도 있다. 자본주의의 냉정한 속성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항해야 하는 인문학적 본질일 수도 있고, 딴에는 인간의 영혼이 그리 동적이지 않기 때문에 멈추어야 볼 수 있다는 균형의 이치일 수도 있다. 말의 초능력을 믿는다면 멈추어야만 흐를 수 있다는 선(禪)적인 깨달음일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중요한 것은 시인이 무엇을 의도하든지 간에 읽는 이의 욕망과 사유의 수준에 맞게 시를 읽게 만든다는 점이다. 대저 좋은 시란 그릇이어야 한다. 국수를 넣어도 상관없고 차가운 냉수만 채워도 상관없다. 담기는 그 무엇의 오지그릇이 되면 그만인 것이다. 거기에 담긴 사유는 당연히 멈추어 고여 있는 것일 게고, 그 고여 있는 것들의 음미는 당연지사 멈추어야 보이는 것일 터이다. 독자는 충분히 멈추고 넘어지고 되돌아가야만 시의 말을 음미할 수 있다. 그러니 시인이 시에 심어둔 씨앗을 틔우게 하려면 응당 독자는 멈추어 서서 사유해야 한다. 시의 맹아적 힘이란 시인의 일방적인 말이 아니라 그 말을 받아들이는 독자의 상상력 안에 내재하기 때문이다.

 

   시인의 말은 허상이다. 시는 독자의 마음을 담는 것으로서만 존재한다. 결국 읽는 사람의 마음을 담을 수 있는 그릇 하나하나가 시 하나하나가 될 뿐이다. 마찬가지로 <애지>는 허상이다. <애지>는 존재하지 않지만 마음을 일으켜 세우는 힘이 센 시를 담는 뚝배기이다. 뚝배기를 찬장에 방치하거나 재떨이로 쓰는 건 무소부재한 독자의 일일 것이다. 뚝배기가 깨져도 <애지>는 ‘너는 비로소 너 자신이’ 될 때까지 멈춘 ‘너’가 ‘사람으로 흘러가기 시작’하게 하는 시만을 담을 것이다.

 

   -- 계간 《애지》 봄호, 〈이 한 편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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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현준 / 전남 벌교 출생.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 수료. 2018년 여름호 《애지》신인상으로 등단. 단국대학교 출강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