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당신은 첫눈입니까 - 이규리

공산(空山) 2020. 12. 18. 19:12

   당신은 첫눈입니까

   이규리

 

 

   누구인가 스쳐지날 때 닿는 희미한 눈빛, 더듬어 보지만 멈칫하는 사이 이내 사라지는 마음이란 것도 부질없는 것 우린 부질없는 것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친 일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낱낱이 드러나는 민낯을 어쩌지 못했을 것이다 생각날 듯 말 듯 생각나지 않아 지날 수 있었다 아니라면 모르는 사람을 붙들고 더욱 부질없어질 뻔하였다 흩날리는 부질없음을 두고 누구는 첫눈이라 하고 누구는 첫눈 아니라며 다시 더듬어보는 허공, 당신은 첫눈입니까

 

   오래 참아서 뼈가 다 부서진 말

   누군가 어렵게 꺼낸다

   끝까지 간 것의 모습은 희고 또 희다

   종내 글썽이는 마음아, 너는,

 

   슬픔을 슬픔이라 할 수 없어

   어제를 먼 곳이라 할 수 없어

   더구나 허무를 허무라 할 수 없어

   첫눈이었고

 

   햇살을 우울이라 할 때도

   구름을 오해라 해야 할 때도

   그리고 어둠을 어둡지 않다 말할 때도

   첫눈이었다

 

   그걸 뭉쳐 고이 방안에 두었던 적이 있다

 

   우리는 허공이라는 걸 가지고 싶었으니까

   유일하게 허락된 의미였으니까

   저기 풀풀 날리는 공중은 형식을 갖지 않았으니

 

   당신은 첫눈입니까

 

 

  『당신은 첫눈입니까 문학동네, 202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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