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한 개의 밤 - 이상

공산(空山) 2020. 11. 1. 12:24

   한 개個의 밤

   이상

 

 

   여울에서는 도도한 소리를 치며

   비류강이 흐르고 있다.

   그 수면에 아른아른한 자색층이 어린다.

 

   십이봉 봉우리로 차단되어

   내가 서성거리는 훨씬 후방까지도 이미 황혼이 깃들어 있다

   으스름한 대기를 누벼가듯이

   지하로 지하로 숨어버리는 하류는

   검으틱틱한 게 퍽은 싸늘하구나.

 

   십이봉 사이로는

   빨갛게 물든 노을이 보이고

 

   종이 울린다.

 

   불행이여

   지금 강변에 황혼의 그늘

   땅을 길게 뒤덮고도 오히려 남을손 불행이여

   소리날세라 신방에 창장을 치듯

   눈을 감은 자 나는 보잘것없이 낙백한 사람.

 

   이젠 아주 어두워 들어왔구나

   십이봉 사이사이로

   하마 별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 아닐까

   나는 그것을 보려고 하지 않았을 뿐

   차라리 초원의 어느 일점을 응시한다.

 

   문을 닫은 것처럼 캄캄한 색을 띤 채

   이제 비류강은 무겁게도 도사려 앉는 것 같고

   내 육신도 천근 주체할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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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류강 : 대동강의 지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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