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흰 밤 - 한영수

공산(空山) 2020. 10. 25. 16:03

   흰 밤

   한영수

 

 

   삼백 년이나 사백 년쯤 된 팽나무를 전경으로 창문을 조금 연다

 

   삼백 년이나 사백 년의 몸을 빌어 나는 영원을 번역하고 싶은 거다 대체로 검고 그것은 종교와도 같이 넓다 여러 군데 구멍이 문득 멈춰 슬픈 일 같은 기색이 돈다 그 겨드랑이로도 사타구니로도 무수한 실핏줄 사이 골목을 바람소리가 들고 난다

 

   골목의 골목을 빠져나오지 못한 발자국이 있다 줄이 풀리고 야생을 쫓아간 낙타가 새끼 때문에 돌아온다는 문장의 맥을 짚다가 숨소리를 모아 밤이여, 불러보는 것인데

 

   나의 태양은 오후 여섯 시에 걸려 있다 지려다 말고 그 자세 그대로다 계속될 것 같은 오후 여섯 시를 유리문 뒤에 세워둔 밤이 잦다

 

 

   『꽃의 좌표 현대시학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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