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의 미학
박정대
촛불을 켠다
바라본다
고요한 혁명을
-- 《문학사상》 1990년 신인상 등단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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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대 시인은 1990년 《문학사상》에 <촛불의 미학>외 6편의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우리 시의 낭만주의적 정신을 가장 순도 높게 구현한 시인으로 평가받는 시인의 마치 향후 시 세계를 암시하는 듯한 선언적 깃발 같은 시다. <촛불의 미학>은 한 사물에 대한 깊이 있는 관찰을 통해 세계 전체를 들여다보는 상상력의 전형을 보여준 프랑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의 책 제목이며 이 나라의 시인들이 거의 텍스트 수준으로 떠받드는 책이기도 하다. 바슐라르는 이 책에서 철저히 시를 옹호하면서 몽상의 과학적 근거들을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의 인용은 박정대 시인 특유의 리듬과 몽환적 예술성을 지닌 그의 시 세계를 말하거나 탁월한 몽상가 바슐라르의 과학적인 사유에 바탕을 둔 시학을 소개하고자 함이 아니다. 시에서 보여주는 ‘촛불’의 의미를 다른 은유의 고려 없이 한 촛불집회에서 받은 느낌을 나이브하게 그대로 전하고자 함이다. 바슐라르는 불꽃의 이미지를 통해 정신의 고양과 몽상의 승리를 예찬하였으나 나는 그곳에서 ‘고요한 혁명을’ 보았다. 바로 성주 군청 앞마당에서의 촛불들인데 그들이 켜든 촛불에서 혁명의 고요한 진앙 같은 기운을 느꼈던 것이다.
사드 배치 철회를 요구하는 성주군민의 촛불집회가 어제로 30일째를 맞았고 29일째 되는 날 그곳에서 나도 그들과 함께 했다. 마침 이날은 미국 백악관에 제출할 사드배치 반대 10만 청원운동을 시작하고서 25일 만에 목표를 돌파한 날이기도 했다. 30일 간 10만 명 이상이 서명할 경우 백악관으로 보내져 60일 내에 이를 검토해 답변을 해야 하는 미국의 제도를 이용한 것인데 지난달 15일 한 교포의 발의에 의해 시작되었다. 독도 한국영토 표기문제 등 이전에 시도됐던 몇 번의 서명운동은 10만에 이르지 못해 불발된 바가 있었다.
이날 열린 29일차 촛불문화제엔 2천여 군민들의 웃음이 가득했다. 진행자가 “오늘이 무슨 날입니까?”라고 물으니 군민들은 한 목소리로 “10만 서명 달성한 기분 좋은 날!”이라고 대답했다. 성주군민이 5만이니 군민의 배가 넘는 사람이 청원에 서명하고 한반도에는 절대 사드가 오지 않기를 강력히 희망한 것이다. 한반도 사드 배치를 반대하는 사람이 어디 이들뿐일까만 서명이 생소한 온라인 방식이고 게다가 영어로 돼있다 보니 접근하기가 쉽지 않고 심지어 이메일 확인절차까지 거치다 보니 서명을 받는데 적지 않은 어려움이 따른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성주군민 3만을 포함해 10만 명 서명이 조기 달성된 것은 대단한 성과라 하겠다. 방학을 맞은 대학생들을 포함한 60여 자원봉사자들이 발품을 팔며 애를 쓴 것도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전국적으로 시민사회단체와 뜻에 공감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동참하였고 군민들의 호소로 야3당도 서명운동에 동참했다. 들리는 얘기로는 미국을 비롯한 해외교포들과 일본의 사드배치지역 주민들까지 관심을 갖고 동참했다고 한다. 이날은 외신기자와 카메라도 여럿 눈에 띄었고 전국에서 농민회와 소비자 단체 등에서도 응원을 왔다.
그 가운데 사드배치 철회와 한반도 평화를 위한 국민들의 염원이 한 촛불에서 타올랐다. 성주 사드반대투쟁이 마치 한반도 평화를 위한 밑불처럼 보였다. 전엔 상상도 못한 ‘이상한’ 일이 감히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꼴통 보수’의 본거지라 여겼던 곳에서 처음엔 ‘님비’ 현상이라 치고 며칠 그러다 말겠지 했는데 웬걸, 이런 투쟁을 한 달 넘도록 이끌어가는 동력이 청와대와 정부당국자의 눈에는 참으로 이상했을 것이다. 어디서 저렇게 젊은 사람들이 나타나서 ‘한반도 사드 배치 반대’를 외치는 걸까. ‘외부세력’이 틀림없다고 봤을 것이다.
실제로 경찰청은 주민등록상 성주군이 아니면 외부사람으로 규정했다. 그런데 대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성주는 귀촌하여 참외 등 농사짓기 여건이 비교적 괜찮은 곳으로 적지 않은 30~40대 젊은 농업인이 거주한다는 사실도 에너지를 결집시켜 이어가는데 얼마간 역할을 했으리라 짐작된다. 집회가 이어지면서 성주 군민들의 의식도 달라졌다. 처음에 성주 배치를 반대했던 군민들이 지금은 한반도 어디에도 안 된다고 부르짖고 있다. 사드란 괴물이 성주군민들을 단결시키고 의식을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어 이제 한반도와 국제 평화를 외치고 있는 것이다.
사드 배치 철회 운동은 이제 시작이다. 성주 군민들은 ‘사드 배치 철회’라는 목표는 국민들이 똘똘 뭉칠 때만 성취할 수 있으리라 보는 것 같았다. “기우제는 언제까지 지냅니까?” 진행자가 묻자 “비올 때까지!”라고 참가자들이 답했다. “사드배치 철회투쟁은 언제까지 합니까?” 그가 다시 물었다. “철회될 때까지!” 성주 군민들이 한 목소리로 외쳤다. 한 참가자는 집회장소인 군청 앞 주차장을 ‘평화나비 광장’으로 명명하자고 제안했다. 10만 서명을 달성한 날 ‘촛불’은 흥겨운 음악 속에서 밤늦도록 어둠을 사르며 예쁘게 타올랐다.
“그네는 아니다,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그네는 아니다” “사드는 아니다,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사드는 아니다” 캐롤 펠리스 나비다(Feliz Navidad)를 개사한 경쾌한 리듬의 노래가 율동과 함께 울려 퍼졌다. 여러 번 들어서인지 성주군민들은 익숙하게 이를 따라 불렀다. “그네는 아니다, 사드는 안 된다” 후렴구가 은근히 중독성이 강해보였다. 이 폭염 속에서 성주군민들의 가장 큰 염려는 자신들이 겪는 고통이 국민들의 관심에서 멀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그래서 그들은 리우 올림픽도 얼른 지나가주기를 바란다.
사드배치 발표 이후 지난 한 달간 성주지역 경제는 엉망이 되어버렸다. 기왕 그런 판국이라 촛불 집회에 참여한 군민들은 모든 것에 우선하여 반대투쟁을 벌이고 있다. 오래전 고향을 떠났지만 나도 이날 시를 한 편 후딱 낭독하고서 기운내시라고, 아프지 마시라고, 하지만 이제부터라고, 아름다운 고향에서 시작한 ‘고요한 혁명’을 함께 하겠노라고 말씀드렸다. 8월 14일엔 서울에서 전국 집중 국민 촛불 집회가 예정돼 있고 8월 15일엔 성주 ‘성밖숲’에서 815명이 참여하는 삭발 퍼포먼스가 예정되어 있다. 강 건너 불구경일 수가 없다. '가만히 있으라'한다고 가만있기도 힘든 상황이다. 이 나라의 평화를 위해, 고요한 혁명을 위해.
권순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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