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쓴 시

깡통밭 약사略史

공산(空山) 2020. 8. 1. 21:06

    깡통밭 약사略史

    김상동

 

 

    옛적, 천지에 말이라곤 없던

    화산 자락 돌밭에 봄이 와서

    달래 같은 말, 쑥 같은 말들 여기저기 자라기 시작하고

    가을이 와서 귀뚜라미가 통역을 시작한 이래

 

    한 시절 하늘을 덮던

    억새들의 수런거림이 제풀에 스러지고

    비틀고 올라타기만 하는 칡덩굴이 비탈을 뒤덮을 때도

    그 칡밭이 다시 아카시아 숲으로 일어나도

    귀뚜라미는 숲속 말들을 받아 노래했네

 

    얼마나 많은 가을이 오고 또 봄이 갔던가

    이 골짜기에 송도松濤가 우렁찬 가운데

    아아 그 솔밭에

    인간이 걸어 다니기 시작하고 길이 생기더니

 

    길가엔 깨진 술병과 타다 남은 비닐봉지에 갇혀 썩어가는 말들, 치미는 부아와 함께 구겨 버려진 신문 활자들, 유체이탈화법의 말을 들려주며 소음을 보태는 라디오와 텔레비전, 온갖 헛소문과 욕설과 본말本末이 뒤집힌 악플만 쏟아내는 찌그러진 깡통, 깡통들……

 

    여기 다시 가을이 왔건만

    비가 오면 온통 깡통들 비 맞는 소리

    바람 불면 깡통들의 악다구니 소리만 들려올 뿐

    귀먹어 떠난 귀뚜라미들은 돌아올 줄 모른다네

 

 

    ― 『대구문학』135호(2018. 11,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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