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쓴 시

오래된 문짝

공산(空山) 2020. 12. 16. 14:43
2022. 2. 26. (토) 촬영 

 

   오래된 문짝

   김상동

 

 

   달랑게처럼 세 식구 달랑 살던

   초가 허물고 양옥 지을 때

   썩은새*, 서까래, 기둥, 문짝들 쌓아 놓고 불태우다가

   섭섭해서 문짝 하나만은 남겨 두었네

 

   문고리 잡으면 손이 쩍쩍 얼어붙던 시절, 아랫목 눌은 장판 위엔 익어 가던 술단지, 윗목엔 앉은뱅이책상, 등잔, 재봉틀, 콩나물시루, 휘어진 시렁에 주렁주렁 매달린 메주들과 함께 문풍지 떠는 소리 듣던 방, 머리를 수그려 문 열고 나오면 시리게 다가오던 하늘, 별들은 또 얼마나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반겨 주었던가!

 

   그 문짝 바람벽에 걸어 놓고

   바라보고 또 바라보네

   부러진 문살은 무명실로 동여맨 곳이 여럿

   문고리는 녹슬었지만 마음은 날마다 들락거리네

 

   저 문 열면 닿지 않는 길 없네

   엄마 손 잡고 외갓집 가던 강둑길부터

   달걀귀신 나오던 모퉁이, 호젓했던 사춘기 적 꽃길

   아버지와 함께 지게 지고 다니던 산길

   내가 마지막으로 가야 할 그 쓸쓸한 길까지도......

 

   오늘은 새벽부터 문짝이 환하다

   먼 길 떠난 봄바람이 돌아오나 보다

 

 

   * 썩은새 : 오래되어 썩은 이엉.

 

   ―『구름의 뿌리』그루, 2020. 11

 

생전의 부모님
오래된 문짝이 걸려 있는 산방(山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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