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정경해
산행하던 걸음이 이정표를 잘못 읽어 산문山門으로 끌었다 일주문 앞에서 나뭇잎처럼 기웃대다 절 마당을 밟는다 목탁소리 들리지 않는 절에서 심해深海를 만난다 불심이 깊어진 은행나무도 합장한 채 침묵이다 고요에 묶인 발이 갈피를 못 잡는데, 잔망한 바람의 재촉에 대웅전 처마 밑 물고기 한 마리가 염불을 시작한다 청아한 목소리는 억겁의 세월 해탈을 말하지만 먼 곳을 향한 눈빛이 공허하다 공중에 매달려 마른하늘을 헤엄치는 저 물고기 길을 잘못 든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산문을 나서는데 물고기의 동그란 눈이 자꾸 따라온다
―《시와소금》2019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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