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 일기

갠 날 아침

공산(空山) 2018. 9. 4. 22:19

오래 전에 떠난 장마가 뒤늦게 다시 돌아왔는지 며칠째 비가 오락가락해서 익은 고추를 말리기가 힘들었다. 밤새도록 비가 내리다가 그친 오늘 아침, 산가에 이틀을 머물며 창밖 파초 이파리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함께 듣던 아내는 비름과 고구마순, 그리고 이웃에게 갖다 줄 호박잎과 들깻잎을 한 봉지씩 따서 담은 가방을 들고 시내로 떠났다. 나는 버스 타는 곳까지 차로 아내를 바래다 주고, 주유소에 들러 휘발유를 몇 리터 사 돌아왔다. 휘발유는, 베다 만 묵밭의 풀을 내일 아침부터 마저 베고, 다음 주말에 있을 문중 벌초 행사와 다다음 주말에 있을 사촌들과의 집안 벌초 때 예초기 연료탱크에 가득 채워 가야할 연료다. 아내는 살뜰히 만든 반찬들 ―― 가지와 정구지(부추) , 정구지 김치, 북어 조림, 풋고추 찜, 박나물 무침 등등의 냉장고 속 목록을 일러 주고 갔지만, 그녀의 말마따나 몸에 해로운(?) 막걸리만 밝히는 내가 그것들을 제대로 찾아 먹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아내를 보내고 나서 나는 동산에 올라 부모님 산소를 둘러본 다음, 다시 산 아래 텃밭으로 걸음을 옮겼다. 올해도 작년에 이어 배추 모종을 사지 않고 씨앗을 심었다. 여기는 높은 지대라 서리가 빨리 오기 때문에 좀 일찍 심어야 한다. 일부는 포트에(86), 일부는 밭의 모판에(810) 파종을 하고, 지난 29일엔 미리 만들어 비닐을 씌워 둔 이랑에다 모종을 했었다. 달게(배게) 심어서 포기 수는 100포기쯤 되지만, 키우면서 춰서(추려서) 아내가 잘 하는 추어탕이나 두어 번 끓여 먹고 김장용으론 20포기쯤만 키울 생각이다. 그것이 이제 겨우 사름을 해서 이파리 크기가 호랑나비 날개만 한데(이 비유는 옛날에 엄마가 즐겨 쓰시던 것이다!), 간밤에 내린 폭우에 무사한지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둘러보니 모두 무사한 듯해서 돌아서려는데, 문득 내 눈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 이랑 앞에 허리를 구부렸다. 빗물에 젖은 배추 이파리가 마치 풀 먹은 문종이처럼 비닐에 달라붙은 것이 많았는데, 햇살에 검은 비닐이 뜨거워지면 이파리가 데겠다는 생각이 얼핏 든 것이다. 이파리를 하나하나 비닐로부터 떼어 주었더니, 그제서야 잠에서 깬 아이처럼 배추는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이래서 농작물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했나 보다. 그때 밭에 나가 보지 않았더라면 어린 배춧잎들이 어찌 되었겠는가. 배추 이랑 옆에 조금씩 심은 김장무와 알타리무는 간밤 폭우에 허리가 휘었을 뿐 모두 괜찮아 보였고, 아내가 정성 들여 심은 쪽파도 이랑 한쪽에서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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