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시

'숲으로 된 성벽' 해설 - 박남희

공산(空山) 2018. 2. 12. 17:29

   숲으로 된 성벽                     
   기형도

 

 
   저녁 노을이 지면
   神들의 商店엔 하나둘 불이 켜지고
   농부들은 작은 당나귀들과 함께
   城 안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성벽은 울창한 숲으로 된 것이어서
   누구나 寺院을 통과하는 구름 혹은
   조용한 공기들이 되지 않으면
   한걸음도 들어갈 수 없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그 城

 

   어느 골동품 商人이 그 숲을 찾아와
   몇 개 큰 나무들을 잘라내고 들어갔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본 것은
   쓰러진 나무들뿐, 잠시 후
   그는 그 공터를 떠났다
 
   농부들은 아직도 그 평화로운 城에 살고 있다
   물론 그 작은 당나귀들 역시

 

 

   ㅡ『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 
   기형도의 유고 시집 <입속의 검은 잎> 해설에서 김현이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고 명명한 이후, 약간은 낯설면서도 구체적인 체험을 육화시킨 그의 시들은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김현은 그의 시를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로 정의했지만, 그의 시에서 보여지는 그로테스크한 면은 단지 ‘리얼리즘’이라는 장르개념의 수식만으로는 쉽게 수용되지 않는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형도의 시를 논할 때 ‘죽음’ 이미지를 말하게 되는데, 그의 내면에 자리한 죽음의식이 단지 개인의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어둠으로까지 확산되어 있는 ‘부정성’의 시대적인 징후들이라는 점에서 보편성을 획득한다. 그의 시가 자아와 세계 사이의 불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그 이면에는 또 다른 탈출구에 대한 열망이 잠재되어 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숲으로 된 성벽>은 그의 시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유토피아 의식’이 드러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시이다. 이 시는 전체적인 분위기가 동화적이고 신비스런 느낌을 준다는 점에서 시인의 유년적 내면의식과 연관성을 지닌다. 어린 아이가 동화적 세계를 좋아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있기 때문이지만, 어른이 동화적인 세계를 그리는 것은 잃어버린 순수한 세계에 대한 열망 때문이다. 기형도가 부재의 현실 속에서 찾아 헤맨 것은 인위적인 힘으로부터 자유로운 순수한 유토피아적 세계이다. <숲으로 된 성벽>은 시인의 유토피아 의식이 결국 ‘자연’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시는 저녁노을이 지고 밤이 되어서 ‘신들의 상점’ 즉 밤하늘에 별이 하나 둘씩 돋아날 때 농부들은 당나귀들과 함께 성으로 사라진다는 다소 환상적이며 동화적인 상상력이 바탕이 되어 있다. 그런데 그 성벽은 ‘숲으로 된 성벽’이라서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왜냐하면 그곳은 “寺院을 통과하는 구름 혹은/조용한 공기들이 되지 않으면/한걸음도 들어갈 수 없는 아름답고/신비로운 그 城”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인이 말하는 공기나 구름은 자연 그대로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순수성을 지닌 존재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순수한 존재들과 대비되는 대상인 ‘골동품 상인’은 그 숲을 찾아와 강제로 큰 나무를 잘라내고 성으로 들어가지만 그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이것은 이 시가 인위로서는 결코 자연과 하나가 될 수 없다는 노장적 사유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장사상에서 말하는 ‘도’ 역시 인위적인 것이 가해지기 이전의 상태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이 시의 주제와 연결된다. 하지만 기형도가 노장과 다른 점은 이 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순수성을 상실한 세계에 대한 비판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그만큼 기형도의 시는 보다 현실적인 삶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김현이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고 명명한 것도 그의 이러한 현실의식 태도와 무관하지 않다. 기형도의 그로테스크함은 그가 부조리한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현실의 모순을 극복해 나가려는 방법적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기형도는 그의 그로테스크함을 문학적으로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고 너무 일찍 우리 곁을 떠났다. 기형도는 지금쯤 ‘숲으로 된 성벽’ 안에서 농부와 당나귀들과 함께 더 이상 그로테스크하지 않은 ‘무위’의 발걸음을 어디론가 옮기고 있을 것이다.

 

   ㅡ 《시산맥 2010년 상반기호, 박남희

 

 

2016. 7. 23. 요세미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