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위선환
삽시간이었다
한 사람이 긴 팔을 내려 덥석 내 발목을 움켜쥐더니 거꾸로 치켜들고는 털털 털었다
부러진 뼈토막들이며 해묵은 살점과 주름살들이며 울컥 되넘어오는 욕지기까지를 깡그리 내쏟았다
센 털 몇 올과 차고 작은 눈물 한 방울도 마저 털고 나서는
그나마 남은 가죽을 맨바닥에 펼쳐 깔더니 쿵! 키 높은 탑신을 들어다 눌러놓았다
그렇게 판판해지고 이렇게 깔려 있는데
뿐인가
하늘이 살몸을 포개고는 한없이 깊숙하게 눌러대는 지경이다
(탑 뿌리에 잘못 걸렸던 하늘의 가랑이를 그 사람이 시침 떼고 함께 눌러둔 것)
잔뜩 힘쓰며 깔려 죽는 노릇이지만
이건,
죽을 만큼 황홀한 장엄(莊嚴)이 아닌가
사지에서 구름이 피고 이마 맡에서 별이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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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환의 시는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상상력을 증폭시키는 매력이 있다. 그는 어떤 고정된 풍경에 서사를 도입하여 극적인 상황을 연출한다. 위선환의 시「지평선」은 ‘지평선’을 단지 하늘과 땅을 나누는 경계로서만 바라보지 않고, 거인의 팔에 의해 모든 것을 털리고 가죽만 남아서 지상에 납작 엎드린 시인 자신의 표상으로 새롭게 바라보고 있다.
거인이 그의 발목을 잡고 거꾸로 털자 그의 몸에서는 “부러진 뼈토막들이며 해묵은 살점과 주름살들이며 울컥 되넘어오는 욕지기까지” 몽땅 쏟아진다. 이러한 상황은 그가 시인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로 볼 수 있다. 즉 세상의 모든 욕심을 버리고 급기야는 자신의 뼈와 살까지 버리는 고행 끝에서 진정한 시인이 탄생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시의 ‘거인’은 ‘詩의 神’인 ‘뮤즈’라고도 볼 수 있다. 거인은 급기야 “센 털 몇 올과 차고 작은 눈물 한 방울도 마저 털고 나서는 그나마 남은 가죽을 맨바닥에 펼쳐 깔더니 쿵! 키 높은 탑신을 들어다 눌러놓”는다. 드디어 시적 화자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지평선’이 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지평선은 단지 하늘과 땅의 경계로만 이루어진 지평선이 아니라 그 위에 무거운 탑신이 눌려있고 그 사이에 “하늘이 살몸을 포개고” 같이 눌러대는 형국을 하고 있다. 이러한 풍경은 진정한 시인으로 거듭나기 위한 통과의례가 얼마나 혹독한 것인가를 잘 말해준다. 거인이 탑신을 눌러놓은 것은 ‘탑신’으로 상징되는 ‘시인의 관’이 얼마나 버거운 것인지를 동시에 말해주는 것이고, 그 사이에 하늘이 함께 눌려있다는 것은 시인의 상상력의 원천이 하늘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시인이 이 시의 말미에서 “잔뜩 힘쓰며 깔려 죽는 노릇이지만/ 이건,/ 죽을 만큼 황홀한 장엄(莊嚴)이 아닌가/ 사지에서 구름이 피고 이마 맡에서 별이 뜬다”는 황홀한 고백을 할 수 있는 것도 지평선이 된 자신의 몸 위에 하늘이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면서 끊임없이 하늘을 꿈꾸고, 하늘이 자신의 사지에서 피워내는 구름과 이마의 별을 바라보면서 황홀을 느끼는 존재인 것이다.
이상의 해석을 참조하면, 이 시는 시인 자신의 고백을 담고 있는 일종의 메타시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위선환 시인은 1960년 용아문학상 수상으로 작품활동 시작했으나, 1970년 이후 30년간 시를 끊고 살다가 2001년『현대시』 9월호에 「교외에서」외 2편 발표하면서 문단활동을 다시 시작한 바 있다. 그가 시 쓰기를 다시 시작한 과정은 그야말로 자신의 뼈와 살까지 모두 털어내고 가죽만 남은 ‘지평선’의 상태에서의 시 쓰기인 셈이다. 모든 것을 비워낸 시인으로서의 ‘지평선’은 바닥이면서 동시에 하늘을 꿈꿀 수 있는 ‘고통’과 ‘황홀’의 경계이다. 위선환 시인은 자신의 주소가 경계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그 경계 사이에 숨어있는 이야기들을 끄집어내어 우리 앞에 새롭게 펼쳐 보여주는 놀라운 재능을 가지고 있다. 나이와 상관없이 그의 시가 늘 젊고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는 비결이 ‘지평선’ 안에 숨어있다.
-- 《시산맥》 2011년 봄호. 박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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