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동균

배가 왔다

공산(空山) 2017. 9. 16. 21:26

   배가 왔다

   전동균

 

 

   비 그친 11월 저녁

   살아 있는 것들의 뼈가 다 만져질 듯한

   어스름 고요 속으로

   배가 왔다

 

   수많은 길들이 흩어져 사라지는

   내 속의 빈 들판과

   그 들판 끝에 홀로 서 있는 등 굽은 큰 나무와

   낡은 신발을 끌며 떠오르는 별빛의

   傳言을 싣고

 

   배는,

   이 세상에 처음 온 듯이

   소리도 없이 지금 막 내 앞에 닿은 배는,

   무엇 하러

   무엇 하러 나에게 왔을까

 

   불타는 녹음과 단풍의 시간을 지나

   짧은 생의 사랑이란, 운명이란

   발목 시린 서러움이란

   끝내 부르지 못할 노래라는 것을 알려주러 왔을까

 

   울음 그친 아이와 같이,

   울음 그친 아이의 맑은 눈동자 같이,

   솔기 없는 영혼을 찾아

   어디로, 이 세상 너머 어느 곳으로

   무거운 내 육신을 싣고 떠나려 왔을까

 

   배가 왔다

   비 그친 11월 저녁

   살아 있는 것들의 뼈가 다 만져질 듯한

   어스름 고요 속으로

   내 손바닥만한 갈색 나뭇잎 한 장이.

 

 

   ㅡ함허동천에서 서성이다세계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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