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동균

매화, 흰빛들

공산(空山) 2017. 9. 16. 21:16

   매화, 흰빛들

   전동균

 

 

   뒤뜰 매화나무에

   어린 하늘이 내려와 배냇짓하며

   잘 놀다 간 며칠 뒤

 

   끝이 뾰족한 둥근 잎보다 먼저

   꽃이 피어서,

   몸과 마음이 어긋나는 세상의

   길 위로 날아가는

   흰빛들

 

   아픈 생의 비밀을 안고 망명하는

   망명하다 끝내 되돌아와

   제자리를 지키는

   저 흰빛의

   저 간절한 향기 속에는

 

   죄짓고 살아온 날들의 차디찬 바람과

   지금 막 사랑을 배우는 여자의

   덧니 반짝이는 웃음소리,

   한밤중에 읽은 책들의

   고요한 메아리가

   여울물 줄기처럼 찰랑대며 흘러와

   흘러와

 

   새끼를 낳듯 몇 알

   풋열매들을

   드넓은 공중의 빈 가지에 걸어두는 것을

   점자처럼 더듬어

   읽는다

 

 

   ―「함허동천에서 서성이다 세계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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