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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비둘기 - 김광섭

성북동 비둘기 김 광 섭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1번지 채석장에 도루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溫氣)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

내가 읽은 시 2015.11.25

한 잎의 여자 - 오규원

한 잎의 여자 오규원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 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 같은 여자, 시집 같은 여자,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 ―『王子가 아닌 한 아이에게』1978.

내가 읽은 시 2015.11.25

맨발 - 문태준

맨발 문태준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

내가 읽은 시 2015.11.25

우라지오 가까운 항구에서

우라지오 가까운 항구에서 이용악 삽살개 짖는 소리 눈보라에 얼어붙은 섣달 그믐 밤이 얄궂은 손을 하도 곱게 흔들길래 술을 마시어 불타는 소원이 이 부두로 왔다. 걸어온 길가에 찔레 한 송이 없었대도 나의 아롱범은 자옥 자옥을 뉘우칠 줄 모른다. 어깨에 쌓여도 하얀 눈이 무겁지 않고나. 철없는 누이 고수머릴랑 어루만지며 우라지오의 이야길 캐고 싶던 밤이면 울 어머닌 서투른 마우재 말도 들려 주셨지. 졸음졸음 귀 밝히는 누이 잠들 때꺼정 등불이 깜빡 저절로 눈감을 때꺼정 다시 내게로 헤여드는 어머니의 입김이 무지개처럼 어질다. 나는 그 모두를 살뜰히 담았으니 어린 기억의 새야 귀성스럽다. 기다리지 말고 마음의 은줄에 작은 날개를 털라. 드나드는 배 하나 없는 지금 부두에 호젓 선 나는 멧비둘기 아니건만 날고..

이용악 2015.11.25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이용악 우리집도 아니고 일가집도 아닌 집 고향은 더욱 아닌 곳에서 아버지의 침상 없는 최후의 밤은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노령을 다니면서까지 애써 자래운 아들과 딸에게 한 마디 남겨 두는 말고 없었고, 아무을만의 파선도 설룽한 니코리스크의 밤도 완전히 잊으셨다. 목침을 반듯이 벤 채. 다시는 뜨시잖는 두 눈에 피지 못한 꿈의 꽃봉오리가 갈앉고 얼음장에 누우신 듯 손발은 식어 갈 뿐 입술은 심장의 영원한 정지를 가리켰다. 때늦은 의원이 아모 말없이 돌아간 뒤 이웃 늙은이의 손으로 눈빛 미명은 고요히 낯을 덮었다. 우리는 머리맡에 엎디어 있는 대로의 울음을 다아 울었고 아버지의 침상 없는 최후의 밤은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이용악 2015.11.25

낡은 집

낡은 집 이용악 날로 밤으로 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집 이집에 살았다는 백성들은 대대손손에 물레줄 은 동곳도 산호 관자도 갖지못했니라 재를 넘어 무곡을 단이던 당나귀 항구로 가는 콩시리에 늙은 둥글소 모두 없어진지 오랜 외양깐엔 아직 초라한 내음새 그득하다만 털보네 간곳은 아모도 몰은다 찻길이 뇌이기 전 노루 맷돼지 쪽제피 이런것들이 앞뒤 산을 마음놓고 뛰여단이던 시절 털보의 셋째 아들은 나의 싸리말 동무는 이집 안방 짓두광주리 옆에서 첫울음을 울었다고 한다 (털보네는 또 아들을 봤다우 송아지래두 불었으면 팔아나먹지) 마을 아낙네들은 무심코 차그운 이야기를 가을 냇물에 실어 보냈다는 그날밤 저릎등이 시름시름 타들어가고 소주에 취한 털보의눈도 일층 붉더란다 갓주지 이야기와 무서..

이용악 2015.11.25

그리움

그리움 이용악(1914~1971)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 백무선 철길 위에 느릿느릿 밤새워 달리는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연달린 산과 산 사이 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어쩌자고 잠을 깨어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1945년 ---------------------- 우리는 북국의 정서를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 분단 이전 우리는 대륙인이었고 우리에겐 북국의 정서가 있었다. 이 시를 읽으면 마음속에 무엇인가 뜨거운 것이 올라온다. 혈관 속에 남아 있는 북국의 정서가 꿈틀대기 때문이다. 유전자가 말을 하기 때문이다. 눈 세상을 뚫고 지나가는 밤 기차, 산과 산 사이의 ..

이용악 2015.11.25

오랑캐꽃

오랑캐꽃 이용악 - 긴 세월을 오랑캐와의 싸움에 살았다는 우리의 머언 조상들이 너를 불러 '오랑캐꽃'이라 했으니 어찌 보면 너의 뒷모양이 머리 태를 드리인 오랑캐의 뒷머리와도 같은 까닭이라 전한다 -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 도래샘도 띳집도 버리고 강 건너로 쫓겨갔단다 고려 장군님 무지무지 쳐들어와 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갔단다 구름이 모여 골짝골짝을 구름이 흘러 백 년이 몇 백 년이 뒤를 이어 흘러갔나 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았건만 오랑캐꽃 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 두 팔로 햇빛을 막아 줄게 울어보렴 목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 ―「인문평론」1940, 「오랑캐꽃」1947.

이용악 2015.11.25

전라도 가시내

전라도 가시내 이용악(1914~1971) 알룩조개에 입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뿐더러 까무스레한 네 얼굴 가시내야 나는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 바람소리도 호개도 인젠 무섭지 않다만 어두운 등불 밑 안개처럼 자욱한 시름을 달게 마시련다만 어디서 흉참한 기별이 뛰어들 것만 같애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 미더운 북간도 술막 온갖 방자의 말을 품고 왔다 눈포래를 뚫고 왔다 가시내야 너의 가슴 그늘진 숲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매이자 술을 부어 남실남실 술을 따르어 가난한 이야기에 고이 잠궈다오 네 두만강을 건너왔다는 석 달 전이면 단풍이 물들어 천리 천리 또 천리 산마다 불탔을 겐데 그래두 외로워서 슬퍼서 치마폭으로 얼굴을 가렸더냐 두 낮 두 밤을 두루미처럼 울어 울어 불술기 구름 ..

이용악 2015.11.24

담쟁이 - 도종환

담쟁이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잎 하나는 담쟁이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내가 읽은 시 2015.1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