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09 4

고고杲杲 - 이자규

고고杲杲    ― 유협 『문심조룡』 물색 편에서   이자규     그것은 높고 깊고 그윽하게 반짝이는 경이    내 눈을 뺏어간 마당은   이미 태양의 간을 발라 피를 뿜는 중이다   내 시신경을 잡고 요요거리는 마당에 이윽고   간밤의 상처가 안경 벗어놓고 사라지기 시작한다    꽃병 없이 낱말도 없이 문장이고 물관인 당신,   자욱하다    바람이 거세되고 기진한 밭이랑을 감싼 흙   산비알에서 온 살점들은 옥토의 추상형   석류꽃들 벌고 오이꽃 피고 긴말 전하지 않아도   푸름으로 알아듣는 남새가 있고   빛과 그늘에 죽고 사는 이파리가 낭자하다    다친 마음은 눈이 밝아서 경물의   기와 운으로 음양을 깃들이고 있는   당신   열린 수정체 너머 내 망막으로 버거운 햇발 노 맞고 서서   이 빛..

내가 읽은 시 2025.03.09

나는 파란고리문어 - 이자규

나는 파란고리문어   이자규     그랬는데 바닷물이 안방까지 밀려왔는데 새끼문어였다   다 커서 생모 찾아 말없이 떠난 막내의 웃는 얼굴   파도야 뒤집어엎어라 쳐라 때려라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도 온몸이 흥건했던    것처럼   수만 꼬리 탐색의 수컷을 만나 단 한 번의 열렬한 사랑인   아무것도 안 먹고 촉수로 바람을 일으킨 어종처럼   잠시도 쉬지 않고 울음보다 강하게 가르친 적을 아는지   마지막 인사인 너    지금은 누가 만지기만 해도 독성이 번지는 살의로 생을 마감하는   파란고리문어의 아픈 blue와 땀나는 波浪 속이다    식후 넘긴 분홍 젤로다 세알이 환각 속 서른 해를 달리고   옹알이처럼 몽실몽실 흰 목덜미를 돌리고 네가 처음 와서   수두로 온 얼굴에 밭죽 뒤집어쓰고 가쁜 숨..

내가 읽은 시 2025.03.09

블랙맘바 - 이자규

블랙맘바   이자규     이제 내 탐지에 걸려들지 마라   나는 네게 내 이빨을 다 주었다    어차피 생은 드러내거나 숨기는 것으로 저무는 것   빠진 눈알을 헹궈 다시 넣는 어미를 지켜보며   外耳에 진동이 자라나고 있는 블랙맘바    엄마, 한밤중에 방문하는 저 모자들이 두려워요   내가 태어날 때 너는 나를 읽어주었단다   그러니까 저들 앞에서 줄타기하고 싶은 걸요    어디선가 너의 이복동생을 물어다 내 등에다 업히고   아버지는 좀 더 높은 쪽에서 하반신이 잘려나갔단다    엄마 내 우주가 대만원이라서 그래요 희미해지는 걸요   돌멩이 위에 침을 흘리고 다니지 마라   집게를 든 손들은 좋아서 발소리를 죽일 것이다   알아요 이제 기척을 듣고도 이빨을 아끼는 걸요    내 둥지 앞에 매해 젊..

내가 읽은 시 2025.03.09

광포리 석화

광포리 석화   이자규     파래 섞은 석화 물회, 하동 광포리 지나   늙을 줄 모르는 달빛만 우수수   노량대첩을 아는 바람이   대교 아래 통통배 왜적 같은 해풍이 거칠다    잘살자는 고속기계문명으로 노쇠해진 닻을 보다   방학 때면 남해군청 앞 할머니 댁으로 갔던 단발머리   노를 저어 건넜던 나룻배도 사라진 지 오래    파도가 센 날은 이쪽 여인숙에서 정유재란을 떠올리며   물별들과 밤을 새웠고   해상봉쇄라는 역사적 기억 속에 들어   한참을 출렁거렸던 바다 울음에 가슴이 아렸다    광포 바닷가에서 따온 석화를 동산처럼 쌓아놓고   하동김을 묶어 냈던 고모는   이젠 녹슨 어구만 닦으며 하는 일이 없다    금오산 허리를 돌아 광양만으로 이어지는 산업차량 행렬이   왜적 풍을 닮았다  ..

내가 읽은 시 2025.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