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욤 아폴리네르

빨강머리 예쁜 여자

공산(空山) 2017. 7. 16. 12:58

   빨강머리 예쁜 여자

   기욤 아폴리네르

 

 

   나 이제 모든 사람들 앞에 섰다 지각(sens)으로 가득 찬 한 사나이

   삶을 알고 있으며 죽음에 대해서도 산 자가 알 만한 것을 알고 있으며

   사랑의 고통과 기쁨을 체험했으며

   때로는 제 생각들을 강요할 줄 알았으며

   몇 개의 언어를 알고 있으며

   적잖이 여행을 했고

   포병대와 보병대에서 전쟁을 겪었으며

   머리에 부상을 입고 클로로포름을 둘러쓰고 수술을 받았으며

   저 몸서리치는 전투에서 가장 훌륭한 친구들을 잃어버린

   나는 낡은 것과 새로운 것 그 두 가지를 한 인간이 알 만큼은 알고 있다

   나는 오늘 친구들이여 우리들끼리의 또 우리를 위한

   이 전쟁을 두려워함도 없이

   전통과 발명의 저 긴 싸움을 판정한다

              저 질서모험의 싸움을

 

   질서 그 자체인 입

   신의 입을 본떠 그 입이 만들어진 그대들이여

   질서의 완성이었던 자들과

   우리를 비교할 때 관대하여라

   어디서나 모험을 추구하는 우리

 

   우리는 그대들의 적이 아니다

   우리는 그대들에게 넓고도 낯선 땅을 주려는 것이다

   신비가 꽃피어 꺾고 싶은 자에게 바쳐진 꽃

   한 번도 보지 못한 색색의 새로운 불꽃

   깊이를 잴 수 없는 일천 개의 환각

   그것들에 실체를 주어야 하리

 

   우리는 선의를 모든 것이 입을 다물고 있는 거대한 나라를 찾으려 한다

   또한 쫓아 버릴 수도 다시 불러올 수도 있는 시간이 있다

   무한과 미래의

   경계에서 줄기차게 싸우는 우리를 가여워 하라

   우리의 실수를 가여워 하라 우리의 죄를 가여워 하라

 

   바야흐로 격동의 계절 여름이 온다

   그리고 내 청춘은 봄과 함께 죽었다

   오 태양이여 이제 그녀 불타는 이성(Raison)의 시간이다

              그래서 나는 기다린다

   그녀가 지닌 고결하고 다정한 형식을

   내 언제까지나 그녀를 따르기 위해 오직 그녀를 사랑하기 위해

   그녀가 다가와 나를 끌어당긴다 자석이 쇠를 당기듯

              그녀는 사랑스런 빨강머리

              매혹의 얼굴을 지녔지

 

   그녀의 머리칼을 황금이라 하리

   사라질 줄 모르는 한 줄기 아름다운 번개

   아니 어렴풋한 다홍빛 속에

   의젓하게 타오르는 불꽃이라 하리

 

   그러나 나를 웃어 다오 웃어 다오

   모든 땅의 사람들 특히 이 땅의 인사들이여

   내 감히 말하지 않은 것 너무나 많기에

   그대들이 말하지 말라 한 것 너무나 많기에

   나를 가엽게 여겨 다오

 

 

   (1918. 3.)

 

   ― 『사랑받지 못한 사내의 노래 민음사, 황현산 옮김,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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