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쓰는 즐거움

공산(空山) 2017. 2. 1. 18:53

   쓰는 즐거움

   쉼보르스카

 

 

   이미 종이 위에 씌어진 숲을 가로질러

   이미 종이 위에 씌어진 노루는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가?

   자신의 입술을 고스란히 투영하는 투사지 위에 씌어진 옹달샘.

   그곳에서 이미 씌어진 물을 마시러?

   왜 노루는 갑자기 머리를 쳐들었을까? 무슨 소리라도 들렸나?

   현실에서 빌려온 네 다리를 딛고서

   내 손끝 아래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

   "고요" 이 단어가 종이 위에서 버스럭대면서

   ""이라는 낱말에서 뻗어나온 나뭇가지를

   이리저리 흔들어놓는다.

 

   하얀 종이 위에서 도약을 위해 웅크리고 있는 글자들,

   혹시라도 잘못 연결될 수도 있고,

   나중에는 구제 불능이 될 수도 있는

   겹겹으로 둘러싸인 문장들.

 

   잉크 한 방울, 한 방울 속에는

   꽤 많은 여분의 사냥꾼들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숨어 있다.

   그들은 언제라도 가파른 만년필을 따라 종이 위로 뛰어 내려가

   사슴을 포위하고, 방아쇠를 당길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

 

   사냥꾼들은 이것이 진짜 인생이 아니라는 걸 잊은 듯하다.

   여기에선 흑백이 분명한, 전혀 다른 법체계가 지배하고 있다.

   눈 깜빡할 순간이 내가 원하는 만큼 길게 지속될 수도 있고,

   총알이 유영하는 찰나적 순간이

   미소한 영겁으로 쪼개질 수도 있다.

   만약 내가 명령만 내리면 이곳에선 영원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

   내 허락 없이는 나뭇잎 하나도 함부로 떨어지지 않을 테고,

   말발굽 아래 풀잎이 짓이겨지는 일도 없으리라.

 

   그렇다, 이곳은 바로 그런 세상.

   내 자유 의지가 운명을 지배하는 곳.

   신호의 연결 고리를 동여매어 새로운 시간을 만들어내고,

   내 명령에 따라 존재가 무한히 지속되기도 하는 곳.

 

   쓰는 즐거움.

   지속의 가능성.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소멸해가는 손의 또 다른 보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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