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재로 지어진 옷 - 나희덕

공산(空山) 2016. 2. 10. 15:41

   재로 지어진 옷

   나희덕

 

 

   흰나비가 소매도 걷지 않고

   봄비를 건너간다

   비를 맞으며 맞지 않으며

 

   그 고요한 날갯짓 속에는

   보이지 않는 격렬함이 깃들어 있어

   날개를 둘러싼 고운 가루가

   천 배나 무거운 빗방울을 튕겨내고 있는 것이다

   모든 날개는 몸을 태우고 남은 재이니

 

   제 마음 몇 배의 돌덩이를 굴려 올리면서도

   걸음이 가볍고 가벼운 저 사람

   슬픔을 물리치는 힘 고요해

   봄비 건너는 나비처럼 고요해

 

   비를 건너가면서 마른 발자국을 남기는

   그는 남몰래 가졌을까

   옷 한 벌, 흰 재로 지어진

 

 

   ------------------------------

   흰 재로 지어진 옷 한 벌을 남몰래 가진 사람은 비를 건너가면서도 마른 발자국을 남긴다. 소매도 걷지 않고 봄비를 건너가는 나비의 고요한 날갯짓 속에는 사실 얼마나 격렬한 삶의 욕망이 있겠는가. 그럼에도 날개를 둘러싼 고운 가루가 천배나 무거운 빗방울을 퉁겨내면서 비를 맞으며 비를 맞지 않으며 가는 나비! 그 나비는 제 마음 몇 배의 돌을 굴리면서도 걸음이 가볍고 가벼운 사람과 같다. 봄비 건너는 나비처럼 무거운 슬픔을 물리치는 힘도 고요히 간직한 사람이다. 한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모든 날개는 몸을 태우고 남은 재인 것처럼 그 사람도 이미 흰 재로 지어진 옷 한 벌을 남몰래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결국 재 혹은 흰 재인데, 이건 삶의 허무나 혹은 어떤 큰 지혜를 가리키는 바, 그런 걸 소유한 사람은 역시 남보다 몇 배의 무거운 돌멩이를 굴리면서도 나비처럼 고요하고 가볍게 한 세상을 건널 수 있지 않겠는가. 참으로 빗속의 나비날개와 흰 재와 그것을 무욕의 사람과 연결시키는 상상력이 놀라울 뿐이다. - 고재종 시인

'내가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양계장집 딸 - 나희덕  (0) 2016.02.10
못 위의 잠 - 나희덕  (0) 2016.02.10
천장호에서 - 나희덕  (0) 2016.02.10
사라진 손바닥 - 나희덕  (0) 2016.02.10
일곱살 때의 독서 - 나희덕  (0) 2016.0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