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광화문, 겨울, 불꽃, 나무 - 이문재

공산(空山) 2016. 2. 10. 15:03

   광화문, 겨울, 불꽃, 나무

   이문재

 

 

   해가 졌는데도 어두워지지 않는다

   겨울 저물녘 광화문 네거리

   맨몸으로 돌아가 있는 가로수들이

   일제히 불을 켠다 나뭇가지에

   수만 개 꼬마전구들이 들러붙어 있다

   불현듯 불꽃나무! 하며 손뻑을 칠 뻔했다

 

   어둠도 이젠 병균 같은 것일까

   밤을 끄고 휘황하게 낮을 켜 놓은 권력들

   내륙 한가운데에 서 있는

   해군 장군의 동상도 잠들지 못하고

   문닫은 세종문화회관도 두 눈뜨고 있다

   엽록소를 버리고 쉬는 겨울 나무들

   한밤중에 이상한 광합성을 하고 있다

 

   광화문은 광화문(光化門)

   뿌리로 내려가 있던 겨울 나무들이

   저녁마다 황급히 올라오고

   겨울이 교란 당하고 있는 것이다

   밤에도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

   광화문 겨울 나무들

   다가오는 봄이 심상치 않다

 

 

   ―『현대문학2001. 1월호

'내가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귀뚜라미 - 나희덕  (0) 2016.02.10
파밭 가에서 - 김수영  (0) 2016.02.10
먼지 칸타타 - 황동규  (0) 2016.02.10
가을 저녁의 시 - 김춘수  (0) 2016.02.06
재춘이 엄마 - 윤제림  (0) 2016.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