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써 이룩한 고아한 인생철학
[ 陶淵明 ]
김창환
철학을 생활화한 시인
도연명(陶淵明)은 동진(東晋)과 송(宋)의 왕조 교체기를 살았다.1) 후한(後漢) 말기 이래의 정치ㆍ사회적 혼란은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 기간에도 계속되었고 위(魏)를 이은 서진(西晋)은 전쟁과 대립으로 얼룩졌던 삼국을 통일하였지만, 황제들의 무능과 이민족의 침략으로 단기간에 막을 내렸다.
2)이민족에게 중원을 빼앗긴 채 남쪽 건업(建業)에 도읍한 동진은 혼란이 극심하여 100여 년 동안에 크고 작은 반란과 전쟁 그리고 농민 봉기가 계속되었다. 도연명이 살던 시기에 재위했던 동진의 제왕 다섯 명 가운데 네 명이 폐위되거나 살해당한 사실이 이러한 혼란을 대변한다. 그리하여 결국 유유(劉裕)에게 멸망당했던 것이다.
도연명은 혼란한 시대를 살면서도, 그 속에서 좌절하거나 불의에 타협하지 않았다. 그것은 현실과 사회를 중시하는 유가와, 자연과 개인을 강조하는 도가로부터 각각의 장점을 조화해 낸 그의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에 유가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나 은거 생활을 한 후에는 도가에 경도되었으며 특히 장자(莊子)의 영향이 지대하였다.
도연명의 사상 중에서 특기할 만한 것으로 그의 생사관과 자연관을 들 수 있다. 도연명은 생사를 자연의 운행에 따른 한 과정으로 보고 삶에 연연해 하거나 죽음에 초조해하지 않았다. 이는 생사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것을 강조한 장자에게서 영향 받은 바가 크다. 장자는, "기(氣)가 변하여 형체(形體)가 있게 되었고, 형체가 변하여 생명이 있게 되었다. 지금 다시 변하여 죽게 되었으니 이는 교대로 춘하추동의 사시가 진행되는 것"이라고 하여 죽음이란 '자연에 순응하는' 한 과정임을 설파하였다. 도연명의 「잡시(雜詩)」 제7수에는 이러한 생사관이 잘 나타나 있다.
내 집은 잠시 머물다 가는 여관이요,
나는 떠나가야 할 나그네 같구나.
떠나가서 어디로 향할 것인가,
남산에 본래의 집이 있다네.3)
생전에 살던 집은 잠시 머무는 여관이니 때가 되면 옛 집, 즉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자연의 일부인 인간도 자연의 변화에 따라가는 것일 뿐이다. 안연지는 도연명의 죽음에 대한 태도를 언급하여, "죽는 것을 돌아가는 듯이 여겼다"고 하였다.
도연명의 자연관은 도가의 무위(無爲)4) 개념에 근거하고 있다. 도가에서 본 자연은 만물의 주재자(主宰者)가 아니다. 만물은 원래 그러한 이치대로 스스로 생성, 소멸한다. 다음 시구에서 도연명의 도가적 자연관을 살필 수 있다.
조물주는 사사로이 힘씀이 없어,
만물이 저절로 성대히 드러난다.
-「형영신(形影神) 신석(神釋)」
'대균(大鈞)'은 자연의 다른 이름이다. 만물은 도(道)의 구체화(具體化)로서 저절로 번성한다. 이는 장자가 말한, "하늘은 사사로이 (만물을) 덮어 주고 있는 것이 아니고, 땅은 사사로이 (만물을) 실어 주고 있는 것이 아니다"는 철리(哲理)를 시로 형상화한 것이다.
도연명은 생활면에서는 '안빈낙도(安貧樂道)', '고궁(固窮)'6) 등 유가에서 획득한 진지함으로 도가의 말류인 방탄(放誕)7)이나 신선 추구에 빠지지 않았다. 즉 노동을 중시하고 생활을 위한 근면을 강조하였다. 정신면에서는 '순응자연(順應自然)', '달관(達觀)' 등 도가에서 획득한 지혜로 유가의 말류인 허위적 명교(名敎)8)나 세속에 물들지 않았다. 즉 유가, 도가의 철학을 선별적으로 취사하여 자신의 인격과 사상을 이루었다고 하겠다.
순응자연의 실천
도연명은 전원에서 직접 농사지으며 그 감회를 시로 표현해 내었다. 「고향집에 돌아옴」 5수가 대표적인 예이다. 제1수에서, 전원으로 돌아와 느끼는 해방감과 만족감을 담백하게 그리고 있다.
젊어서부터 세속에 맞는 기질이 없고,
본성이 원래 산을 좋아하였다.
잘못하여 진세(塵世)의 그물에 떨어져,
단번에 30년을 보내 버렸구나.
매인 새는 옛 숲을 그리워하고,
갇힌 물고기는 옛 연못을 생각한다지.
남쪽 들에서 거친 밭 일구고,
졸박함을 지키고자 전원으로 돌아왔다.
···
집 뜰에는 세상의 잡다함 없고,
빈방에는 한가로움이 넉넉하다.
오랫동안 새장 안에 갇혀 있다가,
다시 자연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9)
전원으로 돌아오니 갇혀 있던 새가 풀려난 것 같은 자유를 느낀다. 벼슬살이에 구속되어 있다가 자연으로 돌아와서 바뀐 것은 더러움과 번잡함이 없는 외부 환경이자 또한 자연의 본성을 따르는 내면의 심경이다. 자연과 융화된 모습이다. 도연명은 벼슬길에 나선 것이 자신의 본성을 위배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러한 구속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연으로의 복귀이다. 여기에서의 자연은 도가에서 말하는 '원래 그러한 상태'와 그 상태가 구현된 공간, 즉 '전원'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은거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초월과 달관의 자유인
도연명은 도가에서 말하는 '달관(達觀)'을 체득했다. 그의 시에는 세속적 욕망을 초월한 달관의 자세, 즉 천진(天眞)에 대한 추구를 보이는 시들이 많다. 「술을 마시며」 제1수에서, 인생에서 곤궁과 영달(榮達)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으니 곤궁에 초조해하거나 영달에 집착하지 말 것을 강조한다.
쇠락과 영달은 정해져 있는 곳 없이,
서로가 교대하며 함께 하는 것이다.
소생(邵生)의 오이밭 일이,
어찌 동릉후(東陵侯)로 있을 때와 같으리오.
추위와 더위가 갈마듦이 있듯이,
사람의 사는 길도 언제나 그렇다.
통달한 사람들은 그 이치를 아니,
아아 다시는 의심하지 않으리.
홀연히 한잔 술을,
해 저무는 저녁 기분 좋게 든다.10)
동릉후로 영화를 누리던 소생(邵生)이란 사람도 곤궁해지자 오이를 길러 생계를 유지하였다. 추위와 더위가 교대로 바뀌듯이 인생의 쇠락과 영달도 이렇게 바뀐다. 이러한 이치를 깨달은 자라면 그 때문에 마음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집착으로부터의 초월이다. 삶과 죽음의 문제도 그렇다. 도연명은 시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그런대로 자연의 변화를 따라 생을 마감할 것이며/ 천명을 즐길 따름이니 다시 무엇을 의심하겠는가?"하고 읊는다. 자연의 이치는 마음으로 체득할 수 있을 뿐,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이를 깨닫고 그것을 '말을 잊음'으로 증명해 보인 시가 「술을 마시며」 제5수이다.
사람들 사는 곳에 오두막집 엮었으나,
수레와 말의 시끄러움이 없다.
묻노니 그대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마음이 초원(超遠)하니 땅은 절로 외떨어진다.
동쪽 울 아래에서 국화를 따다가,
멀리 남산을 보게 되었다.
산의 모습이 저녁 되어 아름다운 가운데,
새들과 더불어 돌아간다.
이 가운데에 참뜻이 있으니,
따져 말하려다 이미 말을 잊었다.11)
마음이 담담하면 외적 조건은 자연히 초월(超越)된다. 여기에서 엿볼 수 있는 세계가 자연의 외물(外物)과 한 덩어리로 존재하는 물아일체(物我一體)12)이자 달관의 경지이다. 국화, 남산, 날아다니는 새, 시인 자신이 모두 하나가 된 경지이다. 도연명의 위대함은 바로 농촌에서 그저 진실하게 살아가는 가운데 도(道)를 체득한 점에 있다. 말없는 가운데 자연의 본질을 체득하고 순응하는 것이 도가 사상의 핵심인 것이다. 도연명은 노자와 장자가 말로 전하고자 했던 도를 몸으로 실천한 사람이라고 하겠다.
소나무와 국화를 좋아했던, 지조의 상징
도연명은 혼란기를 살면서도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 그는 역사적으로, 지조를 위해 곤궁함을 감내하거나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긴 이들을 높이고 기렸다. 은(殷)ㆍ주(周) 교체기의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자기를 알아준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 형가(荊軻), 늙어서도 고궁(固窮)의 절개를 견지했던 영계기(榮啓期) 등이다. 도연명은 「술을 마시며」 제2수에서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선한 일 많이 하면 보답이 있다는데
백이, 숙제는 서산에서 살았네.
선과 악이 진실로 보답 받지 못한다면,
무슨 일로 부질없이 그런 말을 내세웠나.
영계기는 90에도 새끼 띠 하였는데,
하물며 젊은 시절의 굶주림과 추위쯤이야.
고궁(固窮)의 절개를 믿지 않는다면,
백대 후에 장차 누가 전해 주리오.13)
상단의 4구와 하단의 4구에서 의미가 반전되고 있다. 상단에서는 백이, 숙제 같은 사람이 굶어 죽고 영계기 같이 도를 깨달은 이들이 추위에 고생했으니 적선(積善)의 의미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회의하고 있다. 그러나 하단에서 이를 반전시켜서, 어려움 속에서도 굳게 절개를 지켜 훌륭한 이름을 남겨야 한다고 하였다. 백이와 숙제는 은ㆍ주의 왕조 교체기를 맞아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바를 따르고자 죽음도 개의치 않았다. 진(晋)ㆍ송(宋)의 교체기를 살았던 그는 이 때문에 더욱 백이, 숙제와 같이 절의를 지킨 사람들에게 경도되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절개를 소나무, 국화 등 자연물에 빗대어 드러내곤 한다. 공자가,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하였듯이 소나무는 사시사철 푸르름을 잃지 않는 데서 변함없는 절개를 상징하였다. 도연명은 「술을 마시며」 제4수에서,
홀로 선 소나무를 만나게 되어,
날개 거두고 멀리에서 돌아왔다.
거센 바람에 무성한 나무 없는데,
이 그늘만이 유독 쇠하지 않았다.14)
라고 하여 소나무가 풍파에 지친 자신에게 의지처가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귀거래사」에서는, 동산의 오솔길은 거칠어졌으나 소나무와 국화는 그래도 남아서 자신을 반기고 있음을 읊는다.15) 도연명은 소나무와 마찬가지로 국화에 대해서도 어려움에 굽히지 않는 절개를 배우고자 하였다. 「화곽주부(和郭主簿)」 제2수에서, 서리를 무릅쓰고 피어 있는 국화를 소나무와 함께 칭송하여 '서리 아래의 호걸'이라는 것이다.
향기로운 국화는 숲에 피어 빛나고,
푸른 소나무는 바위산 위에 늘어서 있다.
이 곧고 빼어난 모습을 간직한 채,
우뚝하니 서리 아래 호걸이 되었구나.16)
다른 꽃들은 시들어 떨어지는 계절에, 서리를 무릅쓰고 피어나는 국화 및 푸른 잎이 지지 않는 소나무의 기상을 칭송하고 있다. 힘든 시대를 살았던 도연명에게 소나무와 국화는 바로 마음이 서로 통한 벗이었다.
도연명의 시는 평생에 걸쳐 이룩한 그의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도연명은 유가와 도가의 가르침을 잘 조화시켜 삶을 영위한 전형적 예이다. 이렇게 조화된 인격에서 깊고도 감성이 풍부한 시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도연명 시의 가치
끝으로 도연명 시의 문학적 성취가 중국 문학, 나아가 세계 문학에서 지니는 의의를 살펴보자.
첫째는, 오언고시(五言古詩)17)의 완성이다. 오언고시는 한(漢)나라 시대에 유행했던 민가체(民歌體)의 시, 즉 악부(樂府)가 5언(言)으로 정형화하면서 나타난 시체이다. 도연명은 전원에서 체득한 삶의 이치를 담담히 그려냄으로써 5언시의 서정성과 예술성을 최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도연명에 이르러 완성된 5언시를 바탕으로 남조(南朝)를 거치면서 형식적 기교가 강구되어 당(唐)나라 시대에 이르러 근체시가 출현한 점을 고려할 때, 도연명 시의 문학사적 의의는 자못 크다고 하겠다.
둘째는, 전원문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다는 점이다. 『시경(詩經)』 이래 농사를 읊은 시가 많이 있었지만, 농사는 단순한 소재로 등장할 뿐이었다. 도연명은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전원과 자연에 대한 감회를 써냄으로써 중국 문학사에 처음으로 '전원문학'을 등장시켰다. 이후 전원은 시인들에게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셋째는, 이상향(理想鄕)의 제시다. 도연명은 『도화원시(桃花源詩)』의 「병기(幷記)」에서, '도화원'이라는 이상향을 그려냈고 그때부터 도화원은 동양적 유토피아의 전형이 되었다.
넷째는, 후세 사람들에게 이상적인 인격의 본보기를 제시하였다는 점이다. 도연명은 세상을 떠난 직후부터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는데, 그것은 문학적 성취 못지않은 그의 인격과 절개 때문이었다. 송나라 때의 문호 소동파(蘇東坡)는, "내가 도연명에 대해 어찌 그의 시문만을 좋아하겠는가? 그 사람 됨됨이에 있어서 진실로 느끼는 것이 있다"고 할 정도로 도연명의 시 못지않게 그의 인품을 좋아했던 것이다.
그리고 소통(蕭統)은 도연명을 무척이나 좋아하여, 최초로 도연명의 시문(詩文)을 모아 『도연명집(陶淵明集)』을 편찬하였다. 또한 직접 「도연명집서문(陶淵明集序文)」과 「도연명전(陶淵明傳)」을 썼다. 도연명보다 1세기 정도 뒤에 살았던 소통은, 남조(南朝) 양(梁)나라의 황태자-양나라 무제(武帝) 소연(蕭淵)의 장자-로서, 유명한 시문총집(詩文總集)인 『문선(文選)』18)의 편자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도연명의 시가 소개된 것은 삼국 시대로 추정되는 『문선(文選)』의 전래를 통해서이다. 이후 우리 선인들은 도연명의 시문과 그의 인격을 애호하였다. 특히 고려시대 말기에 그 정도가 심하였는데, 이는 시대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왕조 교체기에 처했던 지식인들이 도연명에게서 그 인품과 절개를 배우고자 했기 때문이다. 대표적 인물이 '여말삼은(麗末三隱)'이라고 불리는 포은(圃隱) 정몽주, 도은(陶隱) 이숭인, 목은(牧隱) 이색이다. 이색(李穡)은 조선 시대로 접어든 이후에는 은거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의 생애와 문학은 도연명과 공통되는 점이 많다. 그는 「독귀거래사(讀歸去來辭)」라는 시에서, "흰머리 되어 길게 읊조리니 나도 이젠 끝이련가./ 문 닫고 그저 「귀거래사」나 읽으리라" 하고 읊었다. 도연명의 삶의 자세를 본받고자 하는 바람이었다.
중국 근세의 문예이론가인 유희재(劉熙載)는 그의 대표적 저서 『예개(藝槪)』에서, "시의 품격은 사람의 품격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도연명의 문학이 후대에 끼친 영향과 도연명의 인격이 후대에 미친 영향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의 높은 문학적 성취는 고상하고 위대한 인격에서 나왔던 것이다.
더 생각해 볼 문제들
1. 인생에서 성공이란 무엇인가?
도연명이 유가적 이상에 따라 벼슬길에서 영달하였다면,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형상화한 훌륭한 시들이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2. 지혜로운 삶이란 무엇일까?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그래야 부질없는 갈등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3.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서 우리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지조를 버리고 일신의 편안함을 추구할 것인가, 절개의 견지를 위해 고통을 감내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판단은 평소의 수양된 인격에서 나온다. 인격 수양의 방법은 도연명같은 선현들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것이다.
추천할 만한 텍스트
『한역(韓譯) 도연명전집(陶淵明全集)』, 도연명 지음, 차주환 옮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1.
각주
- 1) 동진은 317년부터 420년까지, 송나라는 420년부터 479년까지 이어졌다.
- 2) 위는 220년부터 265년까지, 서진은 265년부터 317년까지 존속했다.
- 3) 家爲逆旅舍, 我如當去客. 去去欲何之, 南山有舊宅.
- 4) 인위적 조작이 없는 상태이다.
- 5) 大鈞無私力, 萬物自森著.
- 6) 곤궁함에 꿋꿋하여 마음에 변화가 없는 것을 말한다.
- 7) 사회 질서나 규율을 무시하면서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일컫는다.
- 8) 명분(名分)을 중시하고 강조하는 가르침을 일컫는다.
- 9) 少無適俗韻, 性本愛丘山. 誤落塵網中, 一去三十年. 羈鳥戀舊林, 池魚思故淵. 開荒南野際, 守拙歸田園. ··· 戶庭無塵雜, 虛室有餘閑. 久在樊籠裏, 復得返自然.
- 10) 衰榮無定在, 彼此更共之. 邵生瓜田中, 寧似東陵時. 寒暑有代謝, 人道每如玆. 達人解其會, 逝將不復疑. 忽與一觴酒, 日夕歡相持.
- 11) 結廬在人境, 而無車馬喧. 問君何能爾, 心遠地自偏. 采菊東籬下, 悠然見南山. 山氣日夕佳, 飛鳥相與還. 此中有眞意, 欲辯已忘言.
- 12) 자연 속에서 상대와 나에 대한 분별을 초월한 경지이다.
- 13) 積善云有報, 夷叔在西山. 善惡苟不應, 何事空立言. 九十行帶索, 飢寒況當年. 不賴固窮節, 百世當誰傳.
- 14) 因値孤生松, 斂翮遙來歸. 勁風無榮木, 此蔭獨不衰.
- 15) 三逕就荒, 松菊猶存.
- 16) 芳菊開林耀, 靑松冠巖列. 懷此貞秀姿, 卓爲霜下傑.
- 17) 중국 고전시의 한 장르로, 칠언고시(七言古詩)와 함께 고체시(古體詩)를 대표하는 시의 형식이다.
- 18) 『문선』은 중국에서 현존하는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시문총집으로 모두 30권이다. 선진(先秦) 시대에서 양나라 때에 이르기까지 130인의 작품, 700여 편의 시문을 수록하였는데, 역대로 문인ㆍ학자들의 애호를 받았다. 주석본으로 당(唐)나라 시대 이선(李善)의 『문선주(文選注)』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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