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낮 동안의 일 - 남길순

공산(空山) 2024. 3. 26. 20:46

   낮 동안의 일
   남길순(1962~ )


   오이 농사를 짓는 동호씨가 날마다 문학관을 찾아온다

   어떤 날은 한 아름 백오이를 따 와서
   상큼한 오이 냄새를 책 사이에 풀어놓고 간다

   문학관은 날마다 그 품새 그 자리
   한 글자도 자라지 않는다

   햇볕이 나고 따뜻해지면
   오이 자라는 속도가 두 배 세 배 빨라지고

   화색이 도는 동호 씨는 더 많은 오이를 딴다

   문학관은 빈손이라
   해가 바뀌어도 더 줄 것이 없고

   문학을 쓸고

   문학을 닦고

   저만치 동호 씨가 자전거를 타고 오고 있다
   갈대들 길 양쪽으로 비켜나는데
   오늘은
   검은 소나기를 몰고 온다

   문학관을 찾은 사람들이 멍하니 서서 쏟아지는 비를 보고 있다

   지붕 아래 있어도 우리는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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