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개의 피가 섞인 시
정철훈
모스크바-페테르부르크행 야간열차
4인용 침대칸 한쪽은 러시아 노부부
다른 한쪽은 릴리와 나
릴리는 나를 배려한다며 위 칸으로 올라갔고
나는 아래 칸에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모스크바 근교를 벗어날 즈음 들려온 릴리의 목소리
창밖을 내다봐요, 석양이 지고 있어요
나는 카자흐인도 러시아인도 아니지요,
내 혈관에 몇 개의 피가 섞여 흐르는지 나도 몰라요
어머니 말로는 원래 러시아 혈통이었는데
카자흐, 집시, 투르크, 위구르, 아비시니야, 몽골, 카르키스,
그리고 아버지의 혈통인 한민족까지 모두 아홉 개의 피가 섞였다고 하더군요
그 밖에 내가 모르는 수십 개의 피가 섞여 있는지
누가 알겠어요?
나는 손을 위로 뻗어 릴리의 손을 잡았다
수십 개의 피가 섞이고
수십 번의 죽음을 거쳐 뻗어 나온 다섯 손가락
방금 새가 날아간 둥지처럼
릴리의 손은 따스했다
— 『릴리와 들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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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는 정철훈 시인(전 국민일보 기자)의 혼혈 사촌누이로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산다. 시인은 1989년 릴리를 처음 만난 후 30년 동안 여러 차례 알마티에 갔다고 한다. 그리고 “릴리를 통해 혼혈과 이주, 망명과 불귀의 삶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썼다. 알마티, 러시아 연해주, 중국 국경지역 등을 여행하며 쓴 시들을 모은 이번 시집은 북방에 묻혀 있는 한인 디아스포라 이야기를 들려준다.
국민일보 / 시가있는 휴일 2023-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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