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인

김사인, 진보 문학운동의 전위에서 서정의 전위로 - 장석주

공산(空山) 2015. 12. 8. 19:48

김사인,진보 문학운동의 전위에서 서정의 전위로

장석주

 

 

김사인(1956~ )은 충청북도 보은 사람이다. 1982년 동인지 《시와 경제》 창간 동인에 참여하며 시인으로 활동한다. 대전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한 시인은 시를 발표한 1982년에 『한국문학의 현단계 1』에 「지금 이곳에서의 시」를 발표하면서 평론도 함께 시작하였다. 진보적 문학운동의 전위였던 시인은 시집 『밤에 쓰는 편지』(1987)를 내놓고 무려 19년 동안이나 침묵의 시기를 보낸다. 그러다가 두 번째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2006)을 내며 작고 가련한 생명 가진 것들을 따뜻하게 보듬어 안는 빼어난 서정시들을 선보여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2005년 제50회 현대문학상 시 부문을 수상하고, 2006년 제14회 대산문학상 시 부문을 수상했다.

깨끗한 이마와 서늘한 눈매, 눈웃음이 선량한 그이는 겉보기로 한없이 온화한데, 그 온화함은 무른 내면의 징표가 아니다. 개결(介潔)하고 단정한 선비의 풍모를 가진 그이의 내면은 옳고 그름의 분별에 민감하고, 제 처신에 엄격하고 인의가 삼엄하다. 그이는 삼엄하지만 늘 삼엄한 사람이 아니다. 그늘이거나 가는 비, 뒷모습, 풀들의 외로운 떨림과 같은 가녀린 것들을 향한 연민과 비애는 깊어 늘 다정하니, 그 다정함을 흠모하고 따르는 후학들이 많다. 그이가 서슬이 시퍼렇던 독재 시대에 달마다 《노동해방문학》을 내며 반체제의 최전선에서 싸운 전사(戰士)였다는 사실에서 내면의 삼엄함이 슬쩍 드러난다.

이 다정한 이가 시대의 호명에 따라 반체제의 전위에 서서 싸웠다. 학살의 피를 묻힌 손으로 권력을 잡은 얍삽한 독재자들이 그이를 지명 수배자로 지목하고, 잠행하는 그이를 붙잡으려고 공안당국은 혈안이 되곤 했다. 그 시절에는 잘 먹고 잘 사는 게 죄였다. 그이는 그 시절에 잘 못 먹고 잘 못 살았다. 이제 “세상은 변하고 /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네”(「YOL」). 그이가 지금은 서울에 있는 한 대학에서 조용히 후학을 키워내는 일을 하고 있다.

그이는 아주 느릿느릿 말한다. 충청도 억양의 말과 말 사이의 간격은 아주 멀어서 앞말과 뒷말은 그 의미의 끈을 가까스로 이어간다. 숨결을 가진 생명인 듯 어린 말들이 자라나기를 기다리며 그것을 천천히 부려 쓰는 사람이다. 어린 말들은 입속에서 영혼을 키운 뒤 스스로 뜻을 세우고 세상에 나오는 것이다. 마치 위빠싸나 수행자의 걸음만큼이나 느린 그이의 말은 유장하고 또 유장하다. 그이의 글과 글 사이의 간격은 말보다 조금 더 멀다. 봄 모란 움 돋을 때 시작한 문장이 가을 단풍들고 서리 내릴 즈음에야 마침표가 찍힌다.

그이가 진행하던 불교방송의 한 프로그램에 1년간 나간 적이 있다. 대개는 심야시간대의 생방송이었다. 거의 한 시간여를 책 한 권을 갖고 얘기를 나누는데, 아무 원고도 없었다. 원고 없이도 비교적 호흡이 잘 맞았고, 두 사람이 주고받는 얘기를 일부러 기다린다는 사람도 꽤 있었다. 방송에서 물러난 뒤 그이와 나는 만날 일이 뜸해졌다. 그이의 첫 시집과 두 번째 시집 사이의 간격은 19년이다. 그이의 두 번째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2006)은 백석『사슴』 이후의 절창이다.

 

장마는 긴 비다. 오늘도 어제도 그제도 내리는 비가 장마다. 길게 내려서 물은 땅을 적시고 흐르며 흐르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우주적 순환을 한다. 물은 구름으로 떠돌다가 다시 땅으로 내려오고, 낮은 곳에 거하다가 다시 하늘로 돌아간다. 노자는 낮은 곳에 거하는 물의 덕을 찬양한다. “가장 훌륭한 덕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다투지 않고, 주로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上善若水,水善利萬物而不爭,處衆人之所惡).”(노자, 『도덕경』 제8장)

물은 저를 막아서는 장애물을 만나면 감아 돌거나 휘돌아 낮은 곳으로 밤낮없이 나간다. 공자는 강가에 서서 “지나가는 것은 다 이와 같구나. 밤낮으로 흐르되 그 흐름이 약해지지 않는구나.” 했다. 물은 동양의 사상가들이 편애한 뿌리-은유다. 물은 생명의 양육과 관련이 깊다. 지구 밖의 행성에서 고도(高度) 생명체가 있는가, 없는가를 판단할 때 물의 흔적을 찾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물이 없다면 생명체도 없는 것이다. 물은 만물의 근원이다. 물은 만물을 낳고 젖을 먹여 기르는 어미다.

「장마」는 물의 철학적 뜻을 궁구하지 않는다. 장마 탓으로 외부 활동에 제약을 받는 동안의 심심함을 노래한다. 수족 부리는 일을 그만두고 빈둥거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그게 더 길어지면 진력이 난다. 심심함에 거하는 일은 자신에 대한 적극적인 태만이다. 이런 태만의 본질은 생산과 뜻을 향한 게으름이요, 파업이다. 결국 명리의 회피요, 마치 선정(禪定)에 들듯 자기방기의 퇴폐에 드는 것이다. 무릇 선정은 생산과 세상에 뜻을 세우는 일에 대한 방기가 아닌가.

 

공작산 수타사로
물미나리나 보러 갈까
패랭이꽃 보러 갈까
― 김사인, 「장마」, 『가만히 좋아하는』(창작과비평사, 2006)

 

게으름 피우는 일에도 진력이 나면 숲 속 절로 나들이 가기를 꿈꾼다. 절 나들이는 청유(淸遊)라고 할만하다. 청유는 정한(靜閑)의 은밀함, 혹은 은일(隱逸)의 세계를 꿈꾸는 자아와 자연 사이에 이루어지는 생물적 교섭이다. 명산에 속됨이 없고, 절집은 번잡함을 피하기에 적합하니, 청렴하면서도 고요한 공작산 수타사는 은신과 조망하기에는 낙원이다. 그곳이라고 장마가 예외겠는가. 산 속 절도 쉼 없이 내리는 빗줄기의 주렴에 갇혀 있다.

산의 골짜기마다 물은 차고 넘쳐 곳곳에 없던 폭포가 새로 생겨난다. 종일 계곡마다 물소리가 만화방창이다. 가뭄에 허덕이던 나무들은 물을 흠뻑 빨아들여 그 푸름으로 숲은 울울창창하다. 절 안마당의 물미나리나 패랭이도 제철 만나 한창이다. 빗속에서 푸르게 흔들리는 그것을 바라보는 일은 눈을 싱그럽게 하는 즐거운 일이겠다. 그 옆에 있는 물푸레나무와 함박꽃도 조망의 즐거움을 거든다. 들창 너머로 빗줄기에 가려진 먼 산의 푸른 산 빛 보는 게 지겨우면 요사채 아랫목에서 젖은 발을 말린다.

「장마」는 긴 비에 갇혀 오도가도 못 하는 중생의 꿈을 그린다. 아무도 모르는 산사에 숨어 “늙은 부처님께 절도 두어 자리 해바치고”, 그도 지치면 “작은 며느리라도 불러 ‘저물도록’ 민화투나” 친다. 이게 청유의 본질이요, 은일의 희열이 아닐텐가. 이 게으름에 대한 예찬을 너무 나무라지 말기를 바란다. 이 게으름의 경지에서 노니는 게 바로 피정(避靜)이고, 세속에서 묻힌 홍진을 씻어내는 일이 아니겠는가? 올 장마에는 나도 온갖 약속들 다 깨버리고 “수타사 공양주한테, 네기럴 / 누룽지나 한 덩어리 얻어먹으러 갈까”

 

자전거를 끌고
여름 저녁 천변길을 슬슬 걷는 것은
다소 상쾌한 일
둑방 끝 화순집 앞에 닿으면
찌부둥한 생각들 다 내려놓고
오모가리탕에 소주 한 홉쯤은 해야 맞으리
그러나 슬쩍 피해가고 싶다 오늘은
물가에 내려가 버들치나 찾아보다가
취한 척 부러 비틀거리며 돌아간다
썩 좋다
저녁빛에 자글거리는 버드나무 잎새들
풀어헤친 앞자락으로 다가드는 매끄러운 바람
(이런 호사를!)
발바닥은 땅에 차악 붙는다
어깨도 허리도 기분이 좋은지 건들거린다
배도 든든하고 편하다
뒷골목 그늘 너머로 오종종한 나날들이 어찌 없겠는가 그러나
그러나 여기는 전주 천변
늦여름, 바람도 물도 말갛고
길은 자전거를 끌고 가는 버드나무 길이다
이런 저녁
북극성에 사는 친구 하나
배가 딴딴한 당나귀를 눌러 타고 놀러오지 않을라
그러면 나는 국일집 지나 황금슈퍼 앞쯤에서 그이를 마중하는 거지
그는 나귀를 타고 나는 바퀴가 자글자글 소리 내며 구르는 자전거를 끌고
껄껄껄껄껄껄 웃으며 교동 언덕 대청 넓은 내 집으로 함께 오르는 거지
바람 좋은 저녁

― 김사인, 「全州」, 『가만히 좋아하는』

 

전주는 전라북도의 도청이 있는 곳으로 조선 임금을 배출한 전주 이씨의 관향이다. 전주 이가의 시조인 이한은 신라 때 사람인데, 이성계의 20대 조상이다. 영조는 1410년에 전주에 경기전을 세워 여기에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시고, 이 안에 조경묘를 세워 이한의 위패를 모셨다. 전주는 본디 삼한 시절에는 마한 땅이었다가 삼국 시절에는 백제 땅이었다. 백제 때는 완산으로 불리다가 신라에 의해 삼국이 통일 된 뒤 경덕왕 15년에 지금과 같은 전주라는 이름을 얻었다. 견훤이 후백제를 일으켜 신라에 대항할 때 후백제의 도읍지이기도 했다. 조선 왕조 때는 전라도 감영이 있던 곳으로 호남 일대는 물론이고 저 멀리 제주도까지 관할하는 중심지였다. 1949년에 전주시로 승격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려 시대 문인인 이규보는 전주를 일러 “기와집이 즐비하여 옛 도읍의 풍도가 있고 사람들이 수레로 물건을 나르며 의관을 정제하고 다녀 가히 본받을 만하다.”고 했다. 전주시는 전통 가옥들이 집중되어 있는 교동과 풍남동 일대를 한옥보존지구로 지정하여 옛 기와집들을 보존하려고 애쓰고 있다. 전주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전주가 문화예술 도시라는 자긍심이 높은데, 풍류를 즐기면서도 절제할 줄 아는 예의 정신을 흠모하고 따른 유서 깊은 역사가 한몫했음이 틀림없다. 노령산맥 낮은 산줄기들이 전주를 감싸는데, 그 동쪽 방향에 기린봉이 우뚝하다.

기린봉과 그 맞은편인 전주 남쪽을 병풍처럼 두른 완산 칠봉이 전주천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본다. 칠봉 너머 남쪽으로 머리를 내민 봉우리가 보이는데, 그것이 모악산이다. 전주천은 이들 산계에서 흘러온 물들을 받아들이며 일대의 평야를 적시고 서북쪽으로 나아가다가 고산천과 만나 만경강이라는 이름을 얻고 서해로 빠진다. 전주의 볼만한 풍경을 일러 ‘전주 팔경’이라고 하는데, “기린봉 위에 떠오르는 달, 한벽루에서 굽어보는 물안개와 무지개, 해질 무렵에 들려오는 남고사의 저녁 종소리, 전주 남천 곧 남반내에서 아낙네들이 빨래하는 풍경, 덕진 방죽의 연꽃, 위봉사 언저리에 있는 외줄 폭포, 비비정 아래로 내려앉는 기러기떼, 붉은 노을을 등지고 동포로 돌아오는 돛단배를 이른다.”

 

전주 동쪽으로는 진안, 무주, 장수, 서쪽으로는 김제, 부안, 서북쪽으로는 옥구, 군산, 북쪽으로는 익산, 완주, 서남쪽으로는 정주, 정읍, 부안, 고창, 남쪽으로는 임실, 남원, 순창과 맞닿아 있다. 이 고을들로 이어지는 사방 큰 길 어귀에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이 서 있었는데, 지금은 남문만 남고 세 개는 사라졌다. 이 남문을 전주 사람들은 풍남문이라고 부른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전주는 충청남도의 대전, 전라남도의 광주와 견줄 만큼 번성했으나, 그 뒤로 침체 되어 변방의 한 중소도시로 전락하고 만다.

 

김사인의 「전주」는 장소의 발견이 그대로 시가 된 경우다. 알 수 없는 흥겨움과 해찰의 즐거움이 어우러져 능청과 해학이 절로 솟는 너그러워진 마음 본새를 보여주는 이 시는 장소와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 장소는 사람의 행위와 의미를 낳고 기르는 기초적 환경이다. 사람·장소·시간·행위가 하나의 통일체로 질서를 구현할 때 사람은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풍부한 실감과 함께 행복감을 느낀다. 「전주」는 그런 행복감에 젖어든 마음의 한순간을 소묘로써 드러낸다.

시의 화자는 전주 천변 길을 자전거를 끌고 한가롭게 걷고 있다. 버드나무 잎새에는 저녁 햇빛이 자글거리고, 바람은 기분 좋게 옷깃을 파고든다. 천변길을 걷는 화자는 “오모가리탕에 소주 한 홉” 생각과 함께 대작할 이로 “배가 딴딴한 당나귀를 눌러 타고 놀러” 오는 먼 곳에 사는 친구를 떠올린다. 여름 저녁, 천변길, 둑방 화순집, 맑은 물, 쾌적한 바람, 국일집, 황금슈퍼, 교동 언덕 대청 넓은 집……이 모든 경관의 요소들은 시적 화자의 정신 구조에 수렴되어 동화하고, 나아가 주체의 활동에 심미적으로 결합한다.

실로 참된 삶의 느낌이란 ‘나’를 둘러싼 주변 환경을 얼마나 ‘나’와 조화되게 잘 동화시키는가의 능력에 따른 것이다. 시적 화자가 “발바닥이 땅에 차악 붙는” 느낌이 들고 건들 걸음이 되어 걷는 것은 장소와 ‘나’가 하나 된 듯한 일치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의 정체성이 장소의 정체성과 포개져 하나가 될 때 뿌리에 느껴지는 편안함 속에서 고양된 삶의 순간을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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