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인

김사인 시에서 '자연'을 읽다 - 정우영

공산(空山) 2015. 12. 8. 19:40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

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정우영(시인)

 

 

1. 아닌 듯 그러하게, 그러한 듯 아니게

 

인류의 오랜 꿈 중 하나는 아마도 자연과의 다감한 융화(融化)가 아닐까 싶다. 자본주의 시대에 접어들어서는 융화가 아니라 개발이라는 이름의 침탈(侵奪)로 확산되었지만, 자본가를 제외한 대부분 사람들은 여전히 자연의 품속을 꿈꾼다. 특히나 도회지에 사는 사람들은 메말라가는 인성 때문인지, 아니면 시멘트 문명의 염증 때문인지 자연의 모성에 흠뻑 젖고자 한다. 시인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자연의 음과 양이 조화로운, 자기만의 새로운 세계를 시 속에서 창출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자연계는 그야말로 무궁무진한데다가 그 조홧속이 천변만화(千變萬化)라 간절함만 솟구칠 뿐, 대부분 거기에 다다르지 못한다. 시인들은 그 문턱에서 허덕이며 자기 문자속의 졸렬함이나 한탄하기 일쑤다.

 

그런데 달리 생각하면 이는 당연한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자연은 그저 말로만 자연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그 조홧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시인 스스로 천변만화의 변신에 능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변신이어서는 곤란하다.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아닌 듯 그러하게, 그러한 듯 아니게눈을 열고 귀를 열고 마침내는 마음을 열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때의 변신은 단순한 변신이 아니라 전이라는 뜻이 가미된 변전(變轉)일 것이다. 변전, 그렇다. 변전이다. 변전으로 물질적 속성마저도 달라져야 비로소 우주의 음과 양이 조화로운, 새로운 자연계를 그려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변전이 쉽지 않다. 특히 현대사회에 살면서 변전으로 가는 길은 산 첩첩 물 첩첩이다. 자본문명에 매몰된 비인간적이고 천박한 욕망이 자연과의 교감을 딱 가로막고 있다. 제어하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증식하는 이 욕망은 범주의 경계가 없다. 이성과 감성을 두루 다 말아먹고 만다. 현대인들의 심리적 병리현상은 다 여기서 비롯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에 비하면 변전을 주춤거리게 하는 문자의 욕망쯤은 차라리 순진하다 할 것이다. 나는 이 천박한 욕망의 습윤(濕潤)이 자연계로 향하는 시의 발길을 붙잡는다고 믿는다. 자연과 인간, 혹은 물()과 아()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가 드문 이유도 다 이 때문일 터이다. 아마도 근래에 이르러 폭발적인 관심대상이 된 시인 백석쯤이 거기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시인 아닐까.

 

이렇게 생각할 때 같은 연대에 김사인 시와 호흡하고 있음은 얼마나 다행인지. 그는 백석 못잖게 자연의 경계를 넘나들며 교감의 기를 순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2. 그 가녀린 것들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이도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 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는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조용한 일> 전문

 

고맙다. 고마운 일이다. 이런 시를 앞에 놓고 달리 뭐라 더 말을 덧붙이랴. 그저 내 곁에 두고 볼밖에는. 나도 그냥 시인처럼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읊조리면서. 이 모든 일이 이도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 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음 벌어졌다. 하지만, 하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나도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것이다. 그냥 서 있는 것만으로도 나도 저도 고맙다. 낙엽이라는 하찮은 자연물은 그 순간 시인에게 세상 그 무엇보다 귀한 존재가 된 것이다. 이런 게 변전이다. 내 곁에 내린 철 이른 낙엽 하나가 나와 자연 사이의 경계를 슬며시넘어버린 것이다. 아주 조용하게 벌어진 일이며 정말 사소하게 일어난 풍경이다. 그러나 바로 거기에서 자연과 인간의 응대와 교감이 이뤄진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비로소 나는 우주의 저녁 한때를 맞는 것이다.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

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년이나 이백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온 낯익은 냄새가

어느 생에선가 한결 깊어진 그대의 눈빛인 걸 알아보게 되리라 생각한다.

-<풍경의 깊이> 전문

 

그런데 그 우주의 중심은 어디에 있을까.(여기서 내가 생각하는 중심은, 변방과 중심으로 나눌 때의 중심이 아니라 본원이라는 의미에서의 그 중심이다.) 나는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거기라고 여긴다.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지만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그 파동으로 인해 우주의 새벽이 비로소 열리고 또 우주의 저녁 한때가 저물기도 하는 것이다. 이에서 보면 우주의 본원적인 중심은 아주 하찮다. 앞의 시 <조용한 일>낙엽도 우주의 중심이고 위의 시의 키 낮은 풀들도 우주의 중심이다. 이 우주의 중심인 낙엽키 낮은 풀들내리는 기척생의 한순간의 떨림들로 해서 우주는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김사인에 따르면 우주의 생동원리는 다른 게 아니다. 이처럼 하찮고 작고 가녀린 것들의 움직임이다. 그런데 그 움직임은 어떤 성격을 띠고 있는가. 고요이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다. 그는 우주의 중심에서 우주를 우주이게 하는 생동원리는 고요라고 본다. 이 고요는 실은 정중동(靜中動)이며 동중정(動中靜)의 상태이다. 움직임과 멈춤이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듯 섞여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백년이나 이백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우주합일(宇宙合一)의 지경인데 내가 관심 갖는 부분은,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이라는 구절이다. 우주합일을 달리 표현하면 하나가 아니라, ‘무한이다. 그러므로 곤히 잠든 나는 더 이상 가 아니고 무한히 존재하는 우주의 그 무엇이 되는 것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하는 것이다. 그런데 는 다시 무심히 스쳐가는 그것들에 의해 무한에서 깨어난다. 그 촉매제는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온 낯익은 냄새인데 그 냄새는 바로 어느 생에선가 한결 깊어진 그대의 눈빛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무한에서 깨운 것이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온 낯익은 냄새라는 점이며 그 냄새는 또 어느 생에선가 한결 깊어진 그대의 눈빛으로 변전한다는 점이다. 자연과 나를 통한 우주 관계의 인드라망(Indra)이 펼쳐지는 셈이다.

 

 

3. 고요하고 환한, 캄캄한 길

 

상상이 이렇듯 진전되는 까닭에 김사인이 그리는 자연은 그 사유가 깊을 수밖에는 없다. 그럼에도 그의 사유가 관념으로만 떨어지지 않는 것은 사람살이의 짙은 곡절이 그 자연을 배경으로 잘 녹아 있기 때문 아닐까 싶다.

 

이 길, 천지에 기댈 곳 없는 사람 하나 작은 보따리로 울고 간 길

그리하여 슬퍼진 길

상수리와 생강나무 찔레와 할미꽃과 어린 풀들의

이제는 빈, 종일 짐승 하나 지나지 않는

환한 캄캄한 길

 

열일곱에 떠난 그 사람

흘러와 조치원 시장통 신기료 영감으로 주저앉았나

깁고 닦는 느린 손길

골목 끝 남매집에서 저녁마다 혼자 국밥을 먹는,

돋보기 너머로 한번씩 먼 데를 보는

그의 얼굴

고요하고 캄캄한 길

-<풍경의 깊이 2> 전문

 

이 시에서 자연의 길과 사람의 길은 다르면서 같은 궤적을 그린다. 길은 사람을 만나 인격을 얻고 사람은 길을 만나 자연이 된다. 사람과 자연이 만나 그려가는 풍경의 깊이가 깊다. “천지에 기댈 곳 없는 사람 하나 작은 보따리로 울고가자, 길은 슬퍼진다. 그런데 그 슬퍼진 길이 상수리와 생강나무 찔레와 할미꽃과 어린 풀들에게는 환한 길이다. 사람을 비롯 종일 짐승 하나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그 길은 수풀 우거지어 캄캄한 길이 된다. 물론 이때의 캄캄한 길에는 실제만이 아니라 추억도 함께 혼재되어 있다.

 

그리고 그 추억은 조치원 시장통 신기료 영감에게 주저앉는다. 왠지 그에게서 열일곱에 떠난 그 사람”, 곧 천지에 기댈 곳 없어 작은 보따리로 울고 간 그 아이가 겹쳐지기 때문이다. “깁고 닦는 느린 손길이나 골목 끝 남매집에서 저녁마다 혼자 국밥을 먹는,/ 돋보기 너머로 한번씩 먼 데를 보는/ 그의 얼굴에서는 고요하고 캄캄한 길이 떠오른다. 아니다. 떠오르는 게 아니라, “그의 얼굴고요하고 캄캄한 길그 자체일 수도 있다. 얼굴에는 살아온 나의 역사, 나의 길이 고스란히 담겨지는 까닭이다. 그리하여 그 얼굴, 고요하고 캄캄한 그 길은 열일곱 그 아이의 길로 되돌아갈 수 있게 된다. 그러자 그 길, 되돌아가 추억을 찾은 그 길은 환한 캄캄한 길이 되는 것이며, 과거와 현재는 고요 속에서 화해하게 된다.

 

이처럼 길로 표상되는 자연은 인간에게 잃어버린 어떤 근원의 자리를 돌려준다. 이뿐만 아니다. 그의 자연에는 애잔한 연민이나 눅진한 설움 같은 게 다감하게 배어 있다.

 

오는 나비이네

그 등에 무엇일까

몰라 빈 집 마당켠

기운 한낮의 외로운 그늘 한 뼘일까

아기만 혼자 남아

먹다 흘린 밥알과 김칫국물

비어져나오는 울음일까

나오다 턱에 앞자락에 더께지는

땟국물 같은 울음일까

돌보는 이 없는 대낮을 지고 눈시린 적막 하나 지고

가는데, 대체

어디까지나 가나 나비

 

그 앞에 고요히

무릎 꿇고 싶은 날들 있었다

-<나비> 전문

 

이 시에서는 정황적 슬픔이 묘하게 아리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혼자 남은 아기는 먹다 흘린 밥알과 김칫국물사이로 비어져 나오는 울음 울고 있다. 그 울음은 나오다 턱에 앞자락에 더께지는/ 땟국물 같은 울음이다. 이 울음은 이 시를 다 읽고 난 뒤에도 잉잉거리며 귀를 따라다닌다. 그런데 그 정황 속으로 우리를 끌고 가는 것은 나비이다. 그 나비는 빈 집 마당켠/ 기운 한낮의 외로운 그늘 한 뼘을 등에 지고 오는데 거기에서 이런 정황이 따라나오는 것이다. 울음 우는 아기의 묘사가 워낙 구체적이서 실제 같아 보이지만 나는 환상으로 읽는다. 나비가 자아낸 기억 속의 어떤 장면으로 읽히는 것이다. 좀더 상상력을 발휘하면 그 아기는 이미 지워진 세상 속에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럴 때 돌보는 이 없는 대낮을 지고 눈시린 적막 하나 지고가는 나비의 환영이 더 생생해진다. 그리하여 저 나비는 더 이상 나비가 아니게 된다. 나비는 이를테면 아기의 환생일지도 모르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앞에 고요히/ 무릎 꿇고 싶은 날들”, 경배하고 싶은 날들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이 이후로 나는 나비 볼 때마다 애잔한 아기의 울음소리 듣게 될런지도 모르겠다. 잉잉거리는 울음, 왜 나만 혼자 있을까 두려움에 떨다가도 나비 보면 잠깐 쉬었다가 다시 생각나 이어가는 그런 울음. 이런 것도 혹 나비 효과일까. 흔히 말해지는 카오스이론에서의 나비 효과가 아닌, 김사인식 나비 효과.

 

 

4. 언제나 돌아가 울며 아버님께 여쭐 것인가

 

한편, 그는 이와 같은 연민과 설움을 밑바닥에 깔고 자연에의 회억과 외경을 드러내기도 한다.

 

누구도 핍박해본 적 없는 자의

빈 호주머니여

 

언제나 우리는 고향에 돌아가

그간의 일들을

울며 아버님께 여쭐 것인가

-<코스모스> 전문

 

다소곳이 피어 있는 코스모스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읽을 것인가. 김사인은 우선 누구도 핍박해본 적 없는 자의/ 빈 호주머니를 본다. 코스모스, 그 가녀린 몸태에서 그는 자본주의 혹은 물질만능주의를 살아내지 못하는 자, “빈 호주머니밖에는 가진 것 없어 세파에 시달리는 자를 떠올린 것이다. 그는 또한 그게 무엇이든 간에 그것의 성취를 위해 고향을 떠나온 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제 그는 입신(立身)을 바라기에는 지나치게 나이 들은 것처럼 보인다. 머리속에서는 늘 귀향을 꿈꾸지만 돌아갈 명분이 없다. 그러니 어허, 언제나 고향에 돌아가/ 그간의 일들을/ 울며 아버님께 여쭐 것인가.” 코스모스에 빗댄 누군가의 회억이 깊다.

 

그런데 나는 <코스모스>를 되짚어 읽으면서 무언가 부족한 듯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김사인이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이 시에는 이 문맥을 넘는 다른 뜻이 분명 숨겨져 있는 것처럼 비쳐졌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찾은 것이 우주라는 의미의 코스모스이다. 본래 코스모스(cosmos)’는 우주를 뜻하는 그리스어 κόσμος에서 온 단어라고 하지 않던가. 코스모스를 이렇게 읽을 때 누구도 핍박해본 적 없는 자의/ 빈 호주머니는 홀연 다른 뜻이 된다. “누구도 핍박해본 적 없는 자의/ 빈 호주머니가 인간이라면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할, ()한 자의 참살이처럼 읽히는 것이다. ‘고향은 태고적의 어떤 본향이며 아버님은 내 혈육을 넘어서는 자연의 절대자로 여겨진다. “그간의 일들또한 생의 이면에 그려진 그 모든 색채로 보이며 울며 여쭐 것이라 함도 고단한 일생의 해원(解寃)으로 다가든다. 물론 이렇게 읽으면 이 시는 인생이 아닌, 초월자 경배로 읽힐 개연성이 높다. 그래서 주목되는 시어가 언제나이다. “언제나여쭐 것인가라는 시행은 아직은 아님을 전제로 한 발언인 것이다. 그러니 이 시는 초월의 경계를 넘어서기 이전에 서 있는 셈이 아닌가. 이렇게 읽은 나는 코스모스를 통해 자연의 한 외경을 배운다. 그리고 동시에 울며 여쭐아버님의 부재에 적잖이 슬퍼하는 나를 발견한다.

 

위의 시가 자연의 부성에 기댔다면 다음 시는 자연의 모성에 기댄 것처럼 보인다. 나른한 여름 한나절이 그렇듯 평화로울 수가 없다. 아마도 이런 정경이 그가 꿈꾸는 이켠 삶의 전범 아닐까 싶다.

 

풀들이 시드렁시드렁 자랍니다

제 오래비 시누 올케에다

시어미 당숙 조카 생질 두루 어우러져

여름 한낮 한가합니다

 

봉숭아 채송화 분꽃에 양아욱

산나리 고추가 핍니다

언니 아우 함께 핍니다

 

암탉은 고질고질한 병아리 두엇 데리고

동네 한 바퀴 의젓합니다

 

나도 삐약거리는 내 새끼 하나하고 그 속에 앉아

어쩌다 비 개인 여름 한나절

시드렁시드렁 그것들 봅니다

긴 듯도 해서 긴 듯도 해서 눈이 십니다

-<여름날> 전문

 

여름 한낮 한가한 어느 집 마당 풍경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풀들이나 꽃, 암탉, 사람들이 구별되지 않고 함께 어우러져 묘사된다는 점이다. 혹 다른 생각을 품을까봐 시인은 풀들(“제 오래비 시누 올케에다/ 시어미 당숙 조카 생질 두루 어우러져”)과 꽃(“언니 아우 함께 핍니다”), 암탉(“동네 한 바퀴 의젓합니다”)에게 인격을 부여하여 사람과 동등하게 대우한다. 자연과 인간의 경계가 사라진 공간이다. 이 시공간에서 특히 내가 관심 갖는 부분은, “시드렁시드렁이라는 부사어의 사용이다. 사전에는 올라 있지 않지만 아마도 시들시들사부자기를 함께 담은 듯한 이 단어의 사용으로 이 공간은 구체적이면서도 이상적인 어떤 곳으로 공간 확장이 이뤄진다. 그리하여 풀들이 시드렁시드렁 자라는 것과 나도 삐약거리는 내 새끼 하나하고 그 속에 앉아” “시드렁시드렁 그것들보는 것이 같은 무게로 다가오게 만든다. 풀들과 내 새끼의 보이잖는 생명성을 시드렁시드렁으로 풀 뿐만 아니라, 풀들의 인격과 나의 인격이 동등함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자연의 모성 안에서는 이처럼 귀한 것과 하찮은 것의 구별이 무의미하다. 분별심이 없는 것이다. 그가 긴 듯도 해서 긴 듯도 해서 눈이 십니다라고 쓸 때 시다는 말이, 문득 눈부시다로 바뀌는 기적의 변전을 보이기도 한다. 존재하는 건 그게 무엇이든 다 소중하다는 뜻일 터이다.

 

 

5. 나도 떨리고 그도 또한 떨려서 우주적 교감도 함께 열리리라

 

김사인 시를 여기까지 살피면서 굳이 아쉬운 점을 들춰내자면 그의 자연이 너무 선() 쪽으로 기운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삶의 이켠에서 머무는 자연보다는 보다 더 큰 자연, 본원적인 자연 쪽으로 경사되어 있는 것처럼 비친다. 물론, <노숙>을 비롯, <>, <아카시아>, <맨드라미> 등 사람살이의 아픈 모색 무지근하게 다가오는 시들 적잖으므로 그의 시가 다 훌훌 우주로 날아간 것은 아니다. 나는 다만 그가, 앞에서 말한 우주의 음과 양이 조화로운, 새로운 자연계를 담는 시들에 더 좀 눈 기울여 주길 바랄 뿐이다. 이를테면 <전주(全州)>와 같은 시가 그러한데, <전주(全州)>는 삶과 자연의 융화를 절묘하게 담아내고 있다.

 

자전거를 끌고

여름 저녁 천변 길을 슬슬 걷는 것은

다소 상쾌한 일

둑방 끝 화순집 앞에 닿으면

찌부둥한 생각들 다 내려놓고

오모가리탕에 소주 한 홉쯤은 해야 하리

그러나 슬쩍 피해가고 싶다 오늘은

물가에 내려가 버들치나 찾아보다가

취한 척 부러 비틀거리며 돌아간다

썩 좋다

저녁빛에 자글거리는 버드나무 잎새들

풀어헤친 앞자락으로 다가드는 매끄러운 바람

(이런 호사를!)

발바닥은 땅에 차악 붙는다

어깨도 허리도 기분이 좋은지 건들거린다

배도 든든하고 편하다

뒷골목 그늘 너머로 오종종한 나날들이 어찌 없겠는가 그러나

그러나 여기는 전주천변

늦여름, 바람도 물도 말갛고

길은 자전거를 끌고 가는 버드나무 길

이런 저녁

북극성에 사는 친구 하나쯤

배가 딴딴한 당나귀를 눌러타고 놀러 오지 않을라

그러면 나는 국일집 지나 황금슈퍼 앞쯤에서 그이를 마중하는 거지

그는 나귀를 타고 나는 바퀴가 자글자글 소리내며 구르는 자전거를 끌고

껄껄껄껄껄껄 웃으며 교동 언덕 대청 넓은 내 집으로 함께 오르는 거지

바람 좋은 저녁

-<전주(全州)> 전문

 

전주의 재발견이다. 전주 같지 않은 전주가 다감하게 나를 품어준다. 임실이 고향인 내게 전주는 확장된 고향인 셈인데 나는 김사인처럼 전주를 만나지 못했다. 그의 시를 통해 새삼 전주를 새롭게 느끼는 호사(!)를 경험한다. “저녁빛에 자글거리는 버드나무 잎새들/ 풀어헤친 앞자락으로 다가드는 매끄러운 바람” “썩 좋다.” “뒷골목 그늘 너머로 오종종한 나날들이 어찌 없겠는가.” “그러나 여기는 전주천변/ 늦여름, 바람도 물도 말갛고” “발바닥은 땅에 차악 붙는다/ 어깨도 허리도 기분이 좋은지 건들거린다/ 배도 든든하고 편하다.” 오종종한 인생살이쯤 맘껏 부려놓아도 좋을 풍경이다. “이런 저녁/ 북극성에 사는 친구 하나쯤/ 배가 딴딴한 당나귀를 눌러타고 놀러 오지 않을. “그러면 나는 국일집 지나 황금슈퍼 앞쯤에서 그이를 마중하는 거지.” 그리고 그는 나귀를 타고 나는 바퀴가 자글자글 소리내며 구르는 자전거를 끌고/ 껄껄껄껄껄껄 웃으며 교동 언덕 대청 넓은 내 집으로 함께 오르는 거지.” 아니, 좋으랴. 사방 천지에서 껄껄껄껄껄껄웃는 소리 들려오는 것 같다. 삶과 자연, 자연과 삶이 유쾌하게 어우러져 즐긴다. 유토피아가 딴 데 있는 것 같잖다. 이만하면 전주가 유토피아 아니고 무엇이랴. 북극성에 사는 친구도 놀러오지 않는가. 여기가 우주합일의 지점이다.

 

나는 최근 시를, ‘의 시와 의 시로 분류하여 살펴보는 것에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의 시가 나와 나의 울림이라면, ‘의 시는 나와 너의 어울림이다. 나는 좋은 시는 이 각과 통이 서로 어울려 두루 감동으로 들린 시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이 시 <전주(全州)>가 바로 그렇지 않을까. 김사인의 자연은 시 <전주(全州)>에 이르러 나와 나를 지나 너의 어울림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리하여 와 북극성 친구 관계처럼 우리가 껄껄껄껄껄껄웃으며 자연과 어우러질 때 나도 떨리고 그도 또한 떨려서 우주적 교감도 함께 열리리라 나는 믿는다.

 

(* 이 글의 제목은, 김사인의 시 <풍경의 깊이>에서 빌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