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나는 아직 낙산사에 가지 못한다 - 정호승

공산(功山) 2020. 1. 1. 19:45

   나는 아직 낙산사에 가지 못한다

   정호승

 

 

   나는 아직 낙산사에 가지 못한다

   낙산사에 버리고 온 나를 찾아가지 못한다

   의상대 붉은 기둥에 기대 울다가

   비틀비틀 푸른 수평선 위로 걸어가던 나를

   슬그머니 담배꽁초처럼 버리고 온 뒤

   아직 나를 용서하지 못하는 나를 용서하지 못한다

   이제는 봄이 와도 내 손에 풀들이 자라지 않아

   머리에 새들도 집을 짓지 않아

   그 누구에게도 온전한 기쁨을 드리지 못하고

   나를 기다리는 나를 만나러 가는 길을 이미 잊은 지 오래

   동해에서는 물고기들끼리 서로 부딪치지 않고

   별들도 떼지어 움직이면서 서로 부딪치지 않는데

   나는 나를 만나기만 하면 서로 부딪쳐

   아직 낙산사에 가지 못한다

   낙산사 종소리도 듣지 못한다

 

 

   ― 제19회 공초문학상 수상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