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 낙산사에 가지 못한다
정호승
나는 아직 낙산사에 가지 못한다
낙산사에 버리고 온 나를 찾아가지 못한다
의상대 붉은 기둥에 기대 울다가
비틀비틀 푸른 수평선 위로 걸어가던 나를
슬그머니 담배꽁초처럼 버리고 온 뒤
아직 나를 용서하지 못하는 나를 용서하지 못한다
이제는 봄이 와도 내 손에 풀들이 자라지 않아
머리에 새들도 집을 짓지 않아
그 누구에게도 온전한 기쁨을 드리지 못하고
나를 기다리는 나를 만나러 가는 길을 이미 잊은 지 오래
동해에서는 물고기들끼리 서로 부딪치지 않고
별들도 떼지어 움직이면서 서로 부딪치지 않는데
나는 나를 만나기만 하면 서로 부딪쳐
아직 낙산사에 가지 못한다
낙산사 종소리도 듣지 못한다
― 제19회 공초문학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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