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강물에 띄운 편지 - 이학성

공산(空山) 2019. 12. 31. 10:03

   강물에 띄운 편지

   이학성(1961~ )


 

 

   흐르는 물 위에 편지를 쓴다

   달무리가 곱게 피어났다고 첫줄을 쓴다

   어디선가 요정들의 아름다운 군무가 그치지 않으리니 

   이런 밤은 많은 것들을 떠오르게 한다고 쓴다

   저 물의 깊이를 알 수 없는 것처럼

   도무지 당신의 마음도 알 수 없다고 쓴다

   이곳에 나와 앉은 지 백 년

   저 강물은 백 년 전의 그것이 아니라고 쓴다

   마음을 벨 듯하던 격렬한 상처는 

   어느 때인가는 모두 다 아물어 잊히리라 쓴다

   그럼에도 어떤 일은 잊히지 않으니 

   몇날며칠 같은 꿈을 꾸는 이유를 알 수 없다고 쓴다

   알 수 없는 게 그것뿐이 아니지만 

   어떤 하나의 물음이 

   꼭 하나의 답만 있는 게 아니기에 

   저물어 어두워가는 물 위에 편지를 쓴다

   그러나 강물에 띄운 편지는 

   누구에게도 닿지 못하고 깊은 곳으로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