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에 띄운 편지
이학성(1961~ )
흐르는 물 위에 편지를 쓴다.
달무리가 곱게 피어났다고 첫줄을 쓴다.
어디선가 요정들의 아름다운 군무가 그치지 않으리니
이런 밤은 많은 것들을 떠오르게 한다고 쓴다.
저 물의 깊이를 알 수 없는 것처럼
도무지 당신의 마음도 알 수 없다고 쓴다.
이곳에 나와 앉은 지 백 년,
저 강물은 백 년 전의 그것이 아니라고 쓴다.
마음을 벨 듯하던 격렬한 상처는
어느 때인가는 모두 다 아물어 잊히리라 쓴다.
그럼에도 어떤 일은 잊히지 않으니
몇날며칠 같은 꿈을 꾸는 이유를 알 수 없다고 쓴다.
알 수 없는 게 그것뿐이 아니지만
어떤 하나의 물음이
꼭 하나의 답만 있는 게 아니기에
저물어 어두워가는 물 위에 편지를 쓴다.
그러나 강물에 띄운 편지는
누구에게도 닿지 못하고 깊은 곳으로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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