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 일기

불로5일장

공산(空山) 2019. 8. 20. 18:06

불로 장날이다. 장날이면 아내와 함께 구경을 나가곤 하는데, 오늘은 아내가 문화센터 가는 날이라 차려놓은 점심을 먹고 혼자 장터로 향했다. 집에서 걸어서 15분이면 장에 도착할 수 있다. 햇볕은 따가웠지만 바람은 이제 제법 서늘했다.

 

불로5일장은 전통이 아주 깊다. 내가 어릴 적엔 해안장이라고 했었다. 부근에는 왕산(王山), 공산(公山), 파군치(破軍峙, 파군재) 등 고려 태조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치열한 전투를 벌인 전적지가 있는데, 이 불로(不老)라는 지명도 지묘(智妙), 독좌암(獨坐岩), 시래이(실왕失王), 해안(解顔), 반야월(半夜月), 안심(安心) 등의 지명과 함께 태조가 군사를 모두 잃고 혼자서 도망가던 길목에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이곳이 달성군 해안면에 속해 있던 옛적엔 해안장이라 했고, 대구시 동구로 행정구역이 개편된 이후에는 불로장으로 이름이 바뀐 것이다.

 

지금은 장터 옆으로 신작로가 시원하게 뚫려 있지만 옛날에는 시장 안의 비좁은 길로 동화사행 시골버스가 다녔었다. 팔공산의 남쪽 비탈에 위치한 옛 공산면과, 이 바닥의 해안면 사람들이 다 모이던 곳이 바로 여기였다. 팔공산에선 장작 등의 땔감과, 고추밭이나 토마토밭에 세울 지주대 나무들이 소달구지나 리어카에 많이 실려 나오기도 했었다. 이 장터에서 사 먹던,  삼각뿔 모양의 비닐에 든 빨갛고 파랗고 노란 단물이 생각난다. 감자만 알던 내가 군고구마를 처음 먹어본 것도 이 장터에서였다.

 

여기서 엄마와 힘께 버스를 내려 불로천 둑길을 서쪽으로 10분쯤 걸으면 빨래하는 아낙들이 많이 모여 있는 금호강의 얕은 물을 건널 수 있었다. 강물이 불었을 땐 하류쪽으로 좀 더 걸으면 지금의 경부고속도로 다리가 있는 곳쯤의 둔치에 뱃사공이 사는 외딴집과 나루터가 있어서 아닌 게 아니라 '처녀 사공이 삿대를 젓는' 나룻배를 타고 검단동의 외갓집에 갈 수 있었다. 외갓집에선 이모들이 강에서 잡아온 다슬기와 조개로 맛있는 국을 끓여 주곤 했었다.

 

사람들은 이 5일장에만 가는 것이 아니라 가끔은 큰 시장에도 갔는데, 그곳은 여기서 두어 시간은 더 걸어가야 하는 칠성시장이었다. 어느 가을날 밤이었나 보다. 엄마는 새벽 칠성시장에 내다 팔 홍시를 한 광주리 가득 이고 밤새도록 걸었다고 한다. 문바우*와 파군치를 지나고 아양교와 큰고개도 지나 시장이 가까워지고 먼동이 틀 무렵이었는데, 걸으면서 그만 깜빡 졸았는지, 돌부리가 발을 걸었는지, 그 홍시를 길바닥에 다 쏟아 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내가 어릴 적에 들은 엄마의 경험담이지만,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 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훗날에 졸시 엄마 이야기」가 되었다.

 

   엄마 이야기

   김상동

  

 

   감 이파리 뚝뚝 서럽게 지는 밤

   홍시 한 광주리 가득 이고 나섰단다

 

   육십 리 산길 굽이굽이

   달과 납닥바리* 길동무 삼아

 

   문바우 지나고 파군치 지나고

   아양교도 큰고개도 다 지나서

   희끄무레 동트고 시장이 눈앞인데

 

   이 일을 어쩐단 말이냐

   깜빡 졸았는지 돌부리가 발을 걸었는지

   그 홍시 다 쏟고 말았으니

 

   달도 별도 무안해서 서둘러 이운 길을 

   엄마는 빈 광주리처럼 터덜터덜

   해동갑하여 돌아왔으니

 

 

   * 납닥바리 : 산길을 가는 사람에게 산비탈에서 모래를 뿌리며 따라온다는 짐승. 개호주.

 

 

불로장 이야기를 하다가 너무 멀리 갔나 보다. 아내와 나는 여기서 생선과 과일을 주로 산다. 채소는 텃밭에서 가꾸기 때문이다. 고등어나 갈치, 대구나 아구 같은 생선을 살 땐 늘 가는 좌판에서만 산다. 그만큼 신선도를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좌판 주인은 다른 장터에서 팔다가 남은 생선은 다시 진열하지 않는 것 같았다. 생선에 물을 뿌리지도 않는다. 여주인의 호탕한 성격으로 보아 그날 팔고 남은 생선은 돌아가서 이웃에 그냥 또는 헐값에 나눠줘 버리고, 장에는 신선도가 높은 생선 한정량만을 얼음에 채워 와 팔고 일찍 철수하곤 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선 대형 냉장고를 갖춘 생선가게와의 신선도 차이를 설명할 길이 없다.

 

지난 장날에 산 생선과 과일이 아직 냉장고에 남아 있어서 오늘은 장터 구경을 하다가 삶은 찰옥수수만 몇 개 사 들고 왔다.

 

 

* 문바우 : 지금은 수몰되었지만, 공산댐이 건설되기 전에 공산면 북촌 사람들은 문암천(門岩川, 동화천의 옛 이름)을 따라 나 있는 길로 내왕했었다. 그 도로가 통과하던 문암산(門岩山)과 공산(公山) 사이의 좁은 절벽 구간을 일컫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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