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흰 밤에 꿈꾸다 - 정희성

공산(空山) 2019. 8. 4. 12:34

   흰 밤에 꿈꾸다

   정희성 



   좀처럼 밤이 올 것 같지 않았다 
   해가 지지 않는 사흘 밤 사흘 낮 
   시베리아 벌판을 바라보며 
   어떤 이는 칭기즈칸처럼 말달리고 싶다 하고 
   어떤 이는 소떼를 풀어놓고 싶어하고 
   어떤 이는 감자 농사를 짓고 싶다 하고 
   어떤 이는 벌목을 생각하고 
   또 어떤 이는 거기다 도시를 건설하고 싶은 눈치였다
   1907년 이준 열사는 이 열차를 타고 헤이그로 가며 
   창밖으로 자신의 죽음을 내다보았을 것이다 
   이정표도 간판도 보이지 않는 이 꿈같이 긴 
   기차 여행을 내 생전에 다시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지그시 눈을 감는데 
   누군가 취한 목소리로 잠꼬대처럼 
   “시베리아를 그냥 좀 내버려두면 안 돼?” 
   소리치는 바람에 그만 잠이 달아났다 
   더 바랄 무엇이 있어 지금 나는 여기 있는가 
   좀처럼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가까스로 밤에 이르렀지만 
   아침이 오지 못할 만큼 밤이 길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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