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
최문자(1943~ )
오늘 비는 아무에게도 슬픔을 나눠 준다 우기에는 네 말이 옳았다 오래오래 젖다가 수채화 같은 슬픔이 온다는 말,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사과나무 가지 끝 풋사과 옆이 무너졌다 나도 저렇게 아픈 데를 씻다가 무너졌다 슬픔이 없다면 슬픈 게 여럿이던 나도 없을 것이다 내가 없다면 줄곧 믿어 왔던 이 많은 책들과 수없이 눌렀던 어두운 버튼들, 맘에 내내 서 있던 사람 서랍 속의 흉터들 모두 혼자일 것이다 온 힘을 다해 저렇게 흠뻑 슬플 것이다 죽을 것처럼 들고 온 것들, 저렇게 말할 수 없어서 짧게 말할 수 없어서 슬픔은 머리카락이 길고 형용사처럼 영롱하다 우기에는 슬픈 걸 참아낸다 점 하나 없는 슬픔 언제 그칠까? 슬픔 곁을 개처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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