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우둔 - 한영옥

공산(空山) 2019. 7. 26. 09:22

   우둔

   한영옥

 

 

   망설임 끝에 겨우 접은 망설임이었는데

   함께 발맞추며 걸어가던 길 툭 끊어들더니

   슬며시 동반(同伴)들 저쪽으로 방향을 틀어버린다

   방향을 튼 뒤 재빠르게 멀어져간다

   망설임 끝에 어렵사리 펼친 의욕이었는데

   가파르게 멀어져 뒤따르기 어려웠다

   저쪽은 무성해질 것이다, 화사해질 것이다

   버려진 것이라면 분명 까닭이 있겠는데

   미처 깨달아내지 못한 뭣이 뾰족하겠는데

   황망하게 사방을 둘러봐도 등 비빌 데 없었고

   봄이 오면 이곳도 꽃물결 찰랑댈 거라는 짐작뿐

   겨우 그뿐, 우둔하게 땅만 보며 짐작이 가난했으니

   매끈한 대열에 끼어든 것 애초에 무리였으리

   끊어진 자리에 못박혀서 저쪽 굽어보는 갸웃한 모가지

   혼자만 모르는 그 뭣이 분명 있었던 게지, 있었던 게야

   한 해 두 해 답답하다 오백 년 다 돼가는 느티나무

   그냥 그 자리에서 꽃 짐작만 거듭 환해질 뿐

   헤헤거리며 앞지르기 잘했던 전생(前生)은 깜깜할 뿐.

 

 

  『슬픔이 오시겠다는 전갈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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