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예뻤을 때
이바라기 노리코(茨木のり子, 1926~2006)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거리는 꽈르릉하고 무너지고
생각도 못한 곳에서
파란 하늘 같은 것이 보이곤 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주위의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도 없는 섬에서
나는 멋 부릴 기회를 잃어버렸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아무도 내게 다정한 선물을 주지 않았다
남자들은 거수경례밖에 몰랐고
순수한 눈짓만을 남기고 다들 떠나버렸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 머리는 텅텅 비었고
내 마음은 무디어졌으며
손발만이 밤색으로 빛났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 나라는 전쟁에서 졌다
이런 엉터리없는 일이 있느냐고
블라우스의 소매를 걷어 올리고 비굴한 거리를 쏘다녔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라디오에서는 재즈가 넘쳤다
담배 연기를 처음 마셨을 때처럼 어질어질하면서
나는 이국의 달콤한 음악을 마구 즐겼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아주 불행했다
나는 무척 덤벙거렸고
나는 너무도 쓸쓸했다
그래서 결심했다 될수록 오래 살기로
나이 들어서 굉장히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프랑스의 루오 할아버지처럼
그렇게…
―『내가 가장 예뻤을 때』윤수현 옮김, 스타북스,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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