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시인론

비운의 청년 시인, 윤동주 - 이바라기 노리코

공산(空山) 2019. 3. 1. 21:05

   비운의 청년 시인, 윤동주

   이바라기 노리코(茨木のり, 1926~2006)

 

 

   한국 사람에게 좋아하는 시인은?” 하고 물어보면 윤동주라는 대답이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20대가 아니면 절대로 쓸 수 없는 이 맑고 정갈한 시풍은 젊은이를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오래 살수록 부끄럼 많은 인생이 되어 영혼까지 맑아지는 이런 시는 도저히 쓸 수 없어진다.

   젊어 요절한 시인에게는 특권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다. 젊음이나 순결을 그대로 동결시킨 것 같은 맑고 깨끗함이 후세의 독자까지 매료시켜 항상 수선화와 같은 좋은 향기가 풍긴다.

   요절이라고 하지만, 윤동주는 사고나 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니다. 1945, 일본이 패망하기 바로 반 년 전, 만 스물일곱의 젊은 나이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처음에는 릿쿄대학 영문과에 유학, 이윽고 도지샤대학 영문과로 적을 옮겼고, 독립 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시모가모 경찰에 붙잡혀 후쿠오카로 보내졌다.

   거기서 매일 정체 모를 주사를 맞다가 죽기 직전, 모국어로 어떤 말을 큰 소리로 외친 후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 말이 무엇인지, 일본인 간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동주 씨는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큰 목소리로 외치다가 절명하셨습니다라는 증언은 남았다.

   말하자면 일본 검찰의 손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다. 통한에 대한 이해 없이는 이 시인 가까이에 다가설 수 없을 것이다.

   윤동주는 일본인 스스로 그 죽음의 전모를 밝히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의 존재를 알았기 때문에 나도 조금씩 윤동주의 시를 번역하기 시작했는데,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9년째가 되는 1984년에 이취향 씨에 의해 그의 시 전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완역되었다.

   내 의욕은 꺾였지만, 이취향 씨의 훌륭한 번역과 연구에는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스러운 동요까지 일본어로 읽을 수 있게 되어 너무나 기뻤다.

   윤동주의 원시를 아는 사람은 예사가 아닌 노작(勞作)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윤동주의 배경을 알기 위해 철저하게 발로 걷고 조사한 그 정열에도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그가 유학했던 도쿄, 교토, 후쿠오카 형무소 등 그 족적을 거슬러 올라가며 80대가 된 전직 특별 고등 형사와도 만나는 등 모든 노력을 동원했지만 끝내 옥사의 진상을 밝혀낼 수 없었다고 적고 있다. 안타깝지만, 전모를 밝히고자 했던 그 실증 정신은 신뢰할 수 있다. 언젠가는 부정할 수 없는 확고한 증거를 찾아 명료해졌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도 있다.

   이취향 씨가 보았던 곳, 조사하는 과정에서 느낀 일본 검찰의 높은 벽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윤동주의 죽음은 40여 년 전의 일이다. 왜 그렇게 비밀주의, 은폐주의로 일관하는 것일까. 일본인이든 한국인이든 진지한 연구자에게는 자료를 더욱 많이 공개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또 윤동주의 예전 하숙집이나 연고지 등을 찾아 증언을 얻으려 해도 누구 하나 그를 기억하는 일본인은 없었다고 한다. 사진을 보니 정말 청결한 미청년으로, 결코 엷은 인상이 아니다. 평범하지도 않다. 이상한 일이다.

   사실 내가 윤동주의 시를 읽기 시작하게 된 계기는 그의 사진에 있다. 이렇게 맑고 단아한 얼굴의 청년이 어떤 시를 썼을까에 대한 흥미, 고백하자면 조금은 불순한 동기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대학생같이 보이는 지적인 분위기, 그야말로 티끌 한 점 없을 것 같은 젊고 순수한 모습, 내가 어릴 적 우러러봤던 대학생 중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았지, 하는 어떤 그리운 감정. 윤동주의 인상은 너무나 선명하고 강렬하다. 그런데도 일본인 그 누구의 기억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영문학 연습 85, 동양철학사 80점 등 그 성적도 우수했는데, 교수는 기억하지 않았을까. 루쉰(중국의 문학자옮긴이)에게 있어서 후지노 선생님과 같은 존재가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윤동주의 깊은 고독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쉽게 씌어진 시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윤동주가 저항 시인인지 아닌지를 두고 한국에서도 여러 가지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모양이다. 어쨌든 조선어 탄압 당시 과감하게 한글로 쓴 이들 시는 편지와 함께 친구에게 전해져 어렵사리 후대에 남겨졌다. 하지만 이들을 전부 모아도 100여 편, 일본 관헌에 압수당한 시는 그 후 행방을 모른다. 당시에는 한글로 시를 쓰는 자체가 엄청난 저항이었다고 한다. 남은 반년을 살아남았다면 전후 고국의 제일선에서 곧장 활동을 개시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아쉽게도 생전에는 한 권의 시집도 남기지 못한, 무명의 청년이었다.

   윤동주는 유학 시절, 다치하라 미치조(일본의 서정 시인, 스물넷에 요절했다옮긴이)의 시를 읽었다. 연보를 보고 이를 알았을 때, 깜짝 놀랐다. 윤동주의 시를 읽고 있으면 막연히 그 서정적인 분위기가 다치하라 미치조와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잠의 유혹

   다치하라 미치조

 

   (전략)

   등불처럼

   바람처럼 별처럼

   나의 목소리는 한 곡조씩 이쪽저쪽으로.....

   그러자 너희들은 사과나무에 하얀 꽃이 피고

   자그마한 녹색 열매를 맺고 그것이 상쾌한 속도로 붉게 익어가는 것을

   짧은 동안 잠에 들면서 보곤 한다

 

   돌아와 보는 밤

   윤동주

 

   (전략)

   하루의 울분을 씻을 바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면 마음속으로 흐르는 소리

   이제 사상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 가옵니다

 

   둘 다 사과의 이미지가 등장한다는 것 뿐 아니라, 언뜻 약해 보이지만 피아노선처럼 팽팽히 당겨져 있는 투명하고 서정적인 분위기에 어떤 공통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윤동주 쪽이 훨씬 울적하지만 말이다.

   이제는 들을 길도 없지만, 다치하라 미치조가 시를 어떤 식으로 읽었는지를 알고 싶어서 이를 중심으로 다시 한 번 두 사람의 시집을 꼼꼼히 읽어 보았다.

   자세히 살펴보면 상당히 다르다. 다치하라 미치조의 시는 음악과 같아 의미에 무게를 두지 않는다. 한편 윤동주의 시는 핵이라고나 할까, 정신이 항상 그 속에 집약되어 있어 숨은 의미도 깊다.

   유학생이었던 윤동주는 다치하라 미치조가 죽고 나서 몇 년 후에 그의 시를 읽었을 터이지만, 일제에 우호적인 시인이라는 식으로는 읽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청춘의 애환, 의문 등 오히려 청년들만의 감성을 곰감하면서 읽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다치하라 미치조의 사진은 대체로 아주 조금 입을 벌린 모습인데, 윤동주의 사진은 언제나 꼭 입을 다물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청아한 얼굴이다.

   다치하라 미치조도 윤동주도, 아직까지 각자의 나라에서 어린 여학생들의 사랑을 받으며 그 시가 읽히고 있지만, 그 이유는 사진에서 드러나는 것과 같은 순수함을 시 속에서도 민감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1984년 가을, 일본에서 윤동주의 친동생, 윤일주 씨를 만날 수 있었다. 일주 씨는 건축학자로 성균관대학교 교수이기도 한데, 마침 도쿄대학교 생산기술연구소 객원 교수로 일본을 찾은 것이다.

   윤동주의 시에 아우의 인상화라는 작품이 있는데, 그의 시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한 편이기 때문에 그 동생과의 만남이 한층 더 감동적이었다.

 

   아우의 인상화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앳된 손을 잡으며

   “늬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은, 진정코 설은 대답이다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

   아우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본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젖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열 살 가까이 어린 아우의, 손의 감촉까지 전해져 오는 듯하다. “사람이 되지인간이 되지라고도 번역할 수 있지만, 어쨌든 형의 의표를 찌른 이 대답이 시를 완성시켰다고도 할 수 있다.

   개도 개가 되려 하고, 고양이도 고양이가 되려 할까? 사람은 태어났을 때에는 동물에 지나지 않지만, 오랜 시간이 걸려 필시 죽기 직전까지 인간성을 지향하려는 마음을 잃지 않는 이상한 생물이다.

   윤동주도 그런 마음이 강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어린 아우의 사람이 되지라는 대답에 감동을 받아 반응한 것이겠지.

   게다가 그 아우가 성장할 즈음, 식민 치하의 모국에서는 정당한 인간도 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암담한 생각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라는 행이 되어 분출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어린 시절의 천진한 예언처럼 동생 일주 씨는 58세의 나이에 그야말로 훌륭한 사람이 되어그 시절 형과 나눈 문답을 희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독실하고 음영이 짙은 사람됨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장난스러운 느낌도 들었다.

   “저는 어째서인지 형의 뒤치다꺼리를 하기 위해 태어난 모양이라…….”

   웃으며 말했지만 분명 여러 곳에 흩어져 남겨진 시를 오늘날 보는 것처럼 정연히 그 자취를 더듬어 조사해 시집으로 엮었던 것도 동생이고, 연세대학교에 있는 윤동주 시비를 설계한 것도 일주 씨다. 전문적인 일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형을 위해 썼을까.

   그때 부인과 따님도 함께 만났는데, “이 아이는 큰아버지(윤동주)를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답니다라고 부인이 말하자, 곁에 있던 따님이 부끄러워하며 낭랑한 목소리로 별 헤는 밤한 편을 낭독해 주었다.

   일주 씨는 담담하게 말했다.

   “요즘 아버지를 자주 생각합니다. 어떤 마음으로 형의 유골을 품고 후쿠오카에서 부산, 그리고 기차에 흔들리며 북간도(옛날의 만주) 집까지 돌아오셨을까 하고…….”

   부산에서 북간도까지라면 한반도의 끝에서 끝이다. 머나먼 여정이다. 당시에는 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을까. 울분을 풀 길도 없이 형의 유골을 품고 돌아왔을 아버지의 심정과 그 심정을 헤아리는 아들의 말은, 그 어떤 격렬한 탄핵과 지탄보다도 강하게 내 마음을 찔렀다. 부모는 심상치 않은 아들의 죽음을 확실히 학살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대수롭지 않은 세상 이야기처럼 내뱉은 일주 씨의 그 말이 이렇게 강하고 곧게 내 마음에 닿을 줄이야……

 

   수년 전 나는 배로 시모노세키에서 부산까지 현해탄을 건넌 적이 있다.

   저녁 무렵 출항한 배는 점점 규슈를 벗어나 노을이 짙게 드리운 현해탄의 한가운데로 제 몸을 움직였다. 육지에서 멀어질수록 바다는 쪽빛으로 물들인 항아리처럼 진해졌고 6,000톤의 배는 너울거리는 바다 물결에 한 장의 나뭇잎처럼 자신의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거칠기로 유명한 현해탄도 그날만은 평온한 물결을 유지했다. 나는 시시각각 변하는 바다색과 석양, 그리고 곧이어 찾아온 밤바다의 어둠에 한동안 취해 있었다. 밤하늘을 가득 채운 초가을의 별자리, 보석처럼 반짝이던 오징어잡이 배등 아득한 풍경에 한밤중까지 갑판을 떠날 수 없었다.

   그때 갑판 위의 나를 사로잡았던 짙은 안개가 떠오른다. 공기가 농밀했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려나.

   갑판 위에 자욱이 내려앉은 그 농밀한 공기에서 뭐라 말할 수 없는 슬픈 기운이 느껴졌다. 굳이 말하자면 역사의 비수(悲愁)라고나 할까.

   고대부터 지금까지 현해탄을 오고갔을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과 그 발길에 묻어 함께 이 바다를 건넜을 숱한 심정들을 그려 보았다. 파도 위에서도 파도 아래에서도 짙게 떠도는,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그 농밀한 공기 속에 묻어 있었다.

   평소에 결코 영감이 강한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때의 느낌은 두고두고 내 머리에 남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윤동주의 마음도, 유골을 품고 돌아간 아버지의 마음도 그 안에 섞여 있었던 듯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윤동주의 아버지는 납골 단지에 미처 다 들어가지 못한 아들의 뼛가루를 현해탄에 뿌렸다고 한다.

 

   또 다른 고향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 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이 시는 스물네 살에 쓴 작품으로, 3년 후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는 듯한 시다. 기독교인이기도 했던 윤동주의 또 다른 고향은 어디를 가리키는 것일까.

   동요를 썼던 스무 살 즈음의 펜네임은 동주(童舟)라는 사랑스러운 이름이었다.

   동생인 일주 씨와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그 인품에 점점 빠져들게 되었다. 그와 대화를 하다 보면, 내 뇌리에 사람이 되지라는 윤동주 시 속의 구절이 떠오르곤 했다. 그다지 의식한 적은 없지만, 생각해 보면 젊을 때부터 나 역시 줄곧 인간의 질이란 무엇일까? 사람이란, 어떻게 결정되는 것일까?“를 오랫동안 생각해 왔고 찾아왔다는 사실을 그 형제를 보며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이상한 체험이었다.

   그것은 윤일주라는 훌륭한 인간의 질에 접함으로써 드러난 것으로, 형인 윤동주 역시 이런 사람이었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하게 되었다.

   조용하고 따스하며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이를 느끼게 했던 인격. 하지만 3년 가까이 되는 일본 유학생 시절, 이취향 씨의 세심한 조사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그를 기억하고 있지 않다니…… 뭐라 할 수 없이 한심하다.

   어찌 되었든 윤동주, 일주 형제와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최근 들어 나의 가장 큰 기쁨이다. 이것도 한글을 배워 가는 길, 그 도중의 일이다.

 

 

   『한글로의 여행(ハングルへの旅)박선영 옮김, 뜨인돌출판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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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의 수필 원문은 1990년부터 일본 지쿠마서방(筑摩書房)에서 발행하는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다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