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시

죽란시사첩 서(竹欄詩社帖 序) - 정약용

공산(空山) 2017. 11. 30. 22:53

   죽란시사첩 서(竹欄詩社帖 序)
   정약용(1762∼1836) 
 

   살구꽃이 피면 한 차례 모이고, 복숭아꽃이 피면 한 차례 모이고, 한여름 참외가 익을 때 한 차례 모이고, 서늘한 바람이 나면 서지(西池)에 연꽃 놀이 삼아 한 차례 모이고, 국화꽃이 피면 한 차례 모이고, 겨울 큰 눈이 왔을 때 한 차례 모이고, 세밑에 분매(盆梅)가 피면 한 차례 모인다. 모일 때마다 술과 안주, 붓과 벼루를 준비하여 마시며 시를 읊조릴 수 있도록 한다. 나이 적은 사람부터 먼저 모임을 준비하여 한 차례 돌면 다시 그렇게 하되, 혹 아들을 본 사람이 있으면 모임을 마련하고, 수령으로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마련하고, 승진한 사람이 있으면 마련하고, 자제 중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있으면 마련한다.
 


■ 18세기 말 다산 정약용 형제가 벗들과의 시모임 ‘죽란시사’를 결성하고 함께 정한 규약이다. ‘어느 달 셋째 토요일 3시 무슨 역 3번 출구’도 나쁘달 것은 아니지만 ‘살구꽃 필 때, 복사꽃 필 때, 참외 익을 때’와 비기면 어떠한가. 이 생기롭고 기품 있는 시간들을 멀리 떠나와 과연 우리는 얼마나 더 좋은 사람이 되었나. 인공지능이며 4차 산업혁명 얘기로 마음이 다시 바빠질수록 새봄 머리의 덕담으로 이 글을 다시 읽게 된다. 부러 규약의 울타리를 성글게 둘러 여유와 화목을 보전한 것도 지혜롭다. <김사인·시인·동덕여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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