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나무의 저녁은
전동균
요즘 나의 소풍은
홍은동 뒷산, 몇 해 전 이사 왔을 때 심은
살구나무에게 가는 거야
누군가 사납게 칼질을 해
몸의 절반은 찢겨졌지만
기어코 살아보겠다고, 불구의 제 몸을 제가 부둥켜안고 발버둥쳐
두어 해나 지나서야 전해오는
연둣빛 소식을 만나러 가는 거지
살아남은 한쪽 가지에 어린 꽃망울들
수줍게 매단 살구나무의 저녁은
멀고도 깊어라, 그곳에는
가출한 고양이들도 살고
시골 병원 6인실에서 만난 아버지의 죽음도 살고
오늘 하루도 헛살았구나, 입술 깨문
후회도 살고 있으니
나는 그 옆에 이복형제처럼 앉아
담배 연기를 맛있게 내뿜곤 하지
그러다가
가만히 흔들리는 가지 끝에
제 울음을 환히 밝힌 사랑의 빛들 전등(傳燈)하듯 번지어 오면
내가 떠난 뒤에 남을 세상과
어린 새끼들의 따스한 손바닥과
영영 갚지 못할 부채 같은 연애 따위를 떠올리면서
너무 많은 얼굴을 숨긴
어스름 속으로 잠기어가는 거야
살구나무 그 아픈 가지 중 하나인 듯
파르륵 파르륵 바람의 몸을 떨면서
— 「거룩한 허기」 랜덤하우스코리아,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