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년의 귀신들
강인한
궁성 아래 해자(垓字)를 등에 업고
물살에 하롱하롱
붉은 꽃잎 점점이 떠서 흐르는 이주바시(二重橋).
석양빛이 샤미센(三味線) 소리 나직이 끌며
물결 속으로 가라앉는다.
기시 노부스케는 이윽히 다카키 마사오를 건너본다.
그대는 이토오 히로부미 선생을 어찌 생각는가.
술잔을 입술에서 떼며, 다카키 진정 어린 목소리로 말한다.
감히 가까이할 수 없는 훌륭한 어른입지요.
깊은 지하에서 쇠사슬 끄는 소리
입을 굳게 다문 신음소리, 병사들의 더러운 웃음소리
왁자한 가운데 자지러지는 소녀들 비명소리 아스라하다.
이토오 선생과 다카키 그대와는 참으로 기이한 운명이었지.
하얼빈 역두에 울린 1909년 10.26의 총성과
서울 궁정동을 뒤흔든 1979년 10.26의 총성.
만주에서 만난 그대는 젊고 용맹스러운 군관이었소.
다카키 그대의 충정 넘치는 혈서를 나는 지금도 기억하지.
시험지에 쓴 핏빛도 검은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報國滅私奉公)
어르신,
2차 세계대전에 패한 전범국(戰犯國) 독일에 대한 판결로
베를린에서 비롯된 동, 서독 분단처럼
대동아전쟁에 패한 일본도 국토의 분단을 결행할 즈음,
일본 대신 조선반도를 38선으로 분단한 것
조선이 곧 일본이라 천만 다행,
미래를 내다본 이토오 선생 혜안(慧眼)의 덕입니다.
하여 을사 갑년을 맞는 1965년
한일협약을 성사시킨 건 젊은 날의 제 충정입니다.
실인즉 1961년 그해 11월 발소리를 감추고
이케다 하야토 총리를 만나고 온 때부터 기다린 바
오늘 드리는 훈장*은 저의 촌지(寸志)입니다.
소녀들 울부짖는 소리, 채찍에 등 터지는
광부들 비명 소리, 눈에 불 켠 고양이 떼 울음소리
피 비린내 을씨년스러운** 습기에 싸여서
2025년 을사년의 해후를 기약하며
울리는 징소리에 묻어
검은 연기로 껄껄껄 사라지는 귀신들.
—《청색종이》 2024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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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6일의 역사적 대칭
을사늑약*의 주모자며 우리나라의 주권을 뺏고 일본의 식민지로 삼은 상징적인 인물, 그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伊藤)를 암살한 날은 1909년 10월 26일.
5.16 군사반란을 일으켜 민주 국가의 정권을 빼앗고 군사 독재정부로 온 국민 위에 군림한 박정희, 측근 김재규가 유신 독재자를 암살한 날이 1979년 10월 26일.
여기서 나는 10월 26일의 공통된 역사가 기호로 나타나는 상징적 연계를 직감한다.
또 하나는 민족의식과 관련한 역사의 연대이다. 1919년 기미독립운동이후 60년 만에 찾아온 1979년 10월이 민족적 자각을 환기시켰다는 사실이다.
1964년 전국이 한일회담 반대와 굴욕적인 한일협상을 거부하는 물결로 들끓었다. 급기야 박정희 군사정권 타도를 외치며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른바 6.3항쟁이다. 이에 박정희는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내렸다. 이후 전국 대학교에 휴교령을 내리고 모든 대학교 교문을 닫아건 상태로 협상을 추진하여 해를 넘긴 1965년 을사년 6월 22일 한일협정이 체결되었다. 박정희는 일본이 향후 10년 간에 걸쳐 식민지배에 대한 보상금을 준다는 한일협약에 감지덕지한 것. 그것으로 민족의 한이 씻어진다고 생각한 것일까. 일본의 식민지배가 끼친 가장 큰 원한이 일본을 대신하여 분단되고 그게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음은 지금까지 생각지 못한 것이다.
1945년 8월 일본 열도가 분단될 수 있었다
—을사년(1905), 을사년(1965), 을사년(2025)
일본은 과거 식민지배에 대해서만 마지못해 총리가 몇 번 사죄하였을 뿐이다. 일본은 패전 국가의 한을 지금도 깊이 슬퍼한다.
태평양전쟁 후의 징벌을 일본 대신 실제로는 한국이 감수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서는 누가 진정으로 사죄한 적 있었던가. 대동아전쟁 패전 후 1945년 8월 일본의 속국에서 한국이 독립되었어야만 했다. 실제 전쟁을 저지른 일본의 열도가 분단되었어야 했다.
전쟁을 일으킨 징벌로 패전 독일이 감수한 것처럼, 일본 열도의 분단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지 않은가.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긴 1905년 을사년, 이후 1965년 졸속적인 한일협정 체결을 한 1965년, 그로부터 다시 올해가 2025년 을사년이다.
작년 가을부터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시였다. 두 달쯤 구상의 시간을 보내고 시를 쓰게 된 직접적인 계기를 우연히 만날 수 있었다. 그건 태평양전쟁의 전범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에게 청와대에서 박정희(高木正雄)가 외교부문 최고 훈장을 헌정하는, JTBC 흑백뉴스를 본 것.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자가 과거 만주국(731부대가 있었던)의 책임자며 상관인, 태평양전쟁 전범(戰犯)에게 훈장을 주는 기막힌 장면을 보며 소름이 끼침을 나는 느꼈다.
졸시에서 "울리는 징소리에 묻어/ 검은 연기로 껄껄껄 사라지는 귀신들."은 이토 히로부미, 기시 노부스케, 그리고 다카키 마사오 귀신 셋을 상정해 본 것이었다.
*을사늑약(乙巳勒約) : 1905년 을사년,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오적만이 참석한 회의에서 강제로 체결된 조약. 한국정부의 자주적 외교권을 박탈하고, 한국의 내정을 장악하려는 목적으로 무력에 의해 불법적으로 이루어졌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국내의 반일 열기는 고조되어 각종 반대운동이 일어났고, 국권을 회복하려는 항일의병항쟁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일제식민사관으로는 을사보호조약이란 명칭.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 체결의 공을 치하하여 1970년 6월 18일 한국의 대통령 박정희는 일본의 전범(戰犯)이자 전 총리 기시 노부스케를 청와대로 초청, 수교훈장 광화장을 수여하였다(JTBC).
**을씨년스럽다: 어원은 실질적으로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1905년 을사년(乙巳年)의 세태 분위기를 ‘을사년스럽다’고 표현한 데서 나온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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