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철

불내, 또는 내리는 빗줄기를 잡고 거꾸로 오르며 - 신대철의 시 - 등에

공산(空山) 2015. 12. 23. 15:56

불내, 또는 내리는 빗줄기를 잡고 거꾸로 오르며

- 신대철의 시

등에

 

1.

 

뒤를 돌아보며 아주 먼데쯤에서 서성대는 그림자를 늘 품고 사는 사람에게는 현실이 곧 지나간 일의 음영으로 다가온다. 연대기의 질서에서 볼 때 이미 겪은 일들이 앞날의 풍경을 예시하고 널찍한 그늘을 드리움은, 지금 이 순간, 회상 속의 잔해 더미들 속에서 피어오르는 강렬한 인상이 어떠한 생활의 조건 아래에서도 드러나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역으로 증명한다. 흐르는 시간의 지점에 토막처럼 놓여있는 조각들을 이어주는 것은 실상 의지라기보다는 삶의 자연스러운 감각이다.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기억들은, 그 기억들을 품은 사람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편재하면서 한 곳으로 쏠리다가 휩쓸려간다. 언어가 가진 아이러니한 특성은 현실의 바탕에 숨어 있는 역사적 생성 능력을 끄집어내면서 바로 그것으로 말미암은 시간의 퇴적성을, 아직 오지 않은 저 먼 곳의 눈으로 응시하여 한갓 원시의 흔적으로 되돌려 놓고 마는데 있다. 말의 진정한 뜻에서 허무는 이 같은 언어의 시간성에서 비롯한다.

 

『무인도를 위하여』(1977)를 자신의 첫 시집으로 세상에 내놓은 신대철 시인은 이후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2000)와 『누구인지 몰라도 그대를 사랑한다』(2005)에 이르기까지 허무의 허무성을 줄곧 의식하면서 시 쓰기를 해왔다. 여기서 허무성이란 시간이 가지는 변화의 속성과 그 자연의 추이에 맹목적으로 따라가지 않고 직접 부딪치는 자리에 문득 피어 올리는 존재인식의 냉랭함을 수반하는 비극의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극의식이나 허무성이 세상으로부터 절연된 고독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달아나려고 하고 이것들조차 한데 보듬어 솔직하게 세상에 말 건네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 신대철 시인의 시작(詩作)원리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시인에게 세상은 허무주의자들이 그래왔듯 종국에는 무(無)로 화할 존재태들에 둘러싸인 체념적 주체인식의 대상임을 거부하고, 살아 꿈틀거리는 생성의 영역으로 무심히 들어가고자 하는 광활한 영토일 뿐이다. 그의 시들은 역사적 현재 속에 꼼지락대는 시간의 다발을 풀어내어 사방팔방 돌아다니게 함으로써 허무를 견딘다.

 

 

바람이 가진 힘은 모두 풀어 내어

 

개울물 속에서 물망울이 되게 바람을 적시는 비

 

비 같은 사람을 만나려고 늦가을의 미루나무보다도 훤칠하게 서 있어 본 사람은 보이겠다, 오늘 중으로 뛰어가야 할 길을 바라보며 초조히 구름 속을 서성거리는 빗줄기, 빗줄기쯤.

 

- 「오래 기다리면 오래 기다릴수록」부분

 

첫 시집 『무인도를 위하여』에서 보여주는 시인의 내면은 위 시처럼 바람의 힘을 멎게 하는 비와, 그 비로 하여금 다시 바람에 습윤성을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해내려는 의지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데서 바탕 한다. ‘비 같은 사람’이 드러내는 수직성은 그에 대한 기다림의 시간이 늘어날수록 커질 테지만 마찬가지로 ‘구름 속을 서성거리는 빗줄기’까지 들여다 볼 수 있는 심안만큼이나 섬세해진다. 애초에 끝이 닿지 않을 정도로 불쑥 자라나는 기다림과 그 처음의 자리로 곤두박질치려 서성대는 빗줄기가 교차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위 시의 제목이 말해주듯 기다리는 정서가 비단 ‘오래’라는 시간의 확장과 무관하게 그 깊이 또한 원(原)시간을 뚫고 지나가면서 확장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는 일방향의 시간의식에서 벗어난 자리에서 가능하고 사물과 세계 이면에 들러붙어 있는 기억들의 표정까지 두루 살피는 심미안을 가진 자라야만 느낄 수 있다. 신대철 시인의 시들이 ‘자연성’으로 수렴하기가 십상인 ‘산’‘물’‘강’‘섬’등과 같은 시의 소재들이 가진 심상을 인간적 왜곡을 거치지 않고도 인간의 의식과 관계를 맺어주는지 살펴보는 것 또한 앞에서 거칠게 분석한 시의 의미구조를 뒷받침하고 시인의 ‘허무성’을 좀 더 구체화시키는 일이라고 본다. 

 

2.

 

인간과 자연, 이 두 범주는 하나의 시선에 의해서만 구분될 수 있다. 바로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왔고 자연으로 회귀를 꿈꾸나 이미 원래 그 속에 있었고 그것과 구별할 필요가 없었던 원시영역으로 회귀할 수 없다는 자각적인 시선이다. 그러나 자연이 무한하고 인간은 유한하다고 했을 때 이 둘의 구분은 영구한 시간의 척도에 따른 것이고 또 이럴 때에만 그 구분은 정당하다. 시인이 자연을 좇고 본받는 것은 인간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벗어나는 대척점에 자연이 놓여서가 아니라 선험적이고 원 공간의 자리를 차지하는 그 곳ㆍ그 시간이 잡아당기는 흡인력에 다가서고자 하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자연은 질서가 아니라 혼돈이다. 자연이 끌어당기는 힘에 온몸을 풀어 흘러들어가는 시인의 몸은 황홀하다. 여기에는 원시 공간이 환하게 밝히는 지복의 그늘에 의해 현실이 투과되고 녹아 스러지는 광경을 주시하는 그의 눈만이 파닥거린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시간 속에서 이미 지나간 시간은 서늘하게 시인의 등 뒤에 서 잇다. 그의 시들이 역사적 현장 체험을 말하는듯하나 실은 그보다 본질적인 인간의 심연을 건드리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① 눈 쌓이기를 좀 더 기다려야 한다, 실성한 사람과 문득 마주쳐 그의 山이 되고 싶다, 그가 잠들어 영원히 고요해진 山. - 「사람이 그리운 날2」부분

 

② 나는 하루를 하루 종일 돌았어도

 

분침 하나 약자의 침묵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들어가자, 추위 속으로.- 「추운 山」부분

 

③ 노을 속으로, ……노을은 차지할수록 남는 시간이지. 우리도 그 일부분이야, 사람들 각자 조금씩 차지하고 있으니까. 대개들 저 자신 노을이라 생각하지.

 

우리를 노을로 알고 오는 사람은 없을까요? - 「다시 無人島를 위하여」부분

   

 

『무인도를 위하여』에 실린 시편들 중에서 추려 낸 위 구절들은 빨려들듯 화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자연공간이 어떤 모습으로 화자의 심리ㆍ현실적 배면에 존재하는지 잘 보여준다. 주체(화자)와 대상(산ㆍ노을)이 원래부터 거리를 가지다가 마침내 합일, 또는 융합의 자리에 다다른 것이 아니라 마치 늘였다가 힘을 빼면 되돌아가는 고무줄처럼 인간의 고독과 소외를 끌어안고 제자리로 휙 복귀하는 자연스러움을 드러낸다.

 

①의 ‘실성한 사람’과 ②의 ‘약자의 침묵’은 이런 뜻에서 화자에게 자연으로 회귀하려는 욕망을 추동시킨 동기로만 머물 수는 없다. ③의 ‘노을은 차지할수록 남는 시간’이 의미하는 중층적 시간의식을 염두에 둔다면, 시인에게 인간의 사회적 함의의 외면화는 차라리 자연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나가서 그것의 중력가시권에 벗어나 있거나, 또는 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어서 그 윤곽을 헤아릴 수 없었던 존재들의 특수성을 극명화하는 방법이 된다. 시간은 그에게 한 길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다차원으로 확산하는 것이며, 이 시간의식을 토대로 해서만 ‘역사’와 ‘자연’이 주고받는 총체적 길항관계 속에서 떠다니는 시인의 표정을 이해할 수 있다. 노을의 시간은 곧 죽어서 다시 환하게 피어올리는 시간과 생동하는 삶의 그늘의 시간의 뜻을 가진다. 이러한 시간의식과 자연관이 잘 드러난 시가 「흰나비를 잡으러 간 소년은 흰나비로 날아와 앉고」인데, 이 시의 순환적 시간ㆍ자연관이 시인의 군대체험을 소재로 한 「X」와 「우리들의 땅」의 일그러진 인간존재에 대한 성찰을 거쳐 공간의 확장을 통해 한층 조밀하고 깊어진 시적 세계를 드러낸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와 『누구인지 몰라도 그대를 사랑한다』에 이르면서 만남과 기억을 축으로 한 주제의식이 첫 시집 이후 오랜 기간 동안 숙성한 시인의 사유의 더께를 더한다.

 

첫 시집의 맨 앞자리에 놓인 「흰나비를 잡으러 간 소년은 흰나비로 날아와 앉고」를 『무인도를 위하여』의 주제의식을 대표하는 시로 보기엔 무리가 따른다. 시집해설에서 최원식이 이 시를 두고 ‘70년대에 생산된 가장 아름다운 서정시의 하나’로 손꼽고 있지만, 이 시의 서정적 매혹과는 별도로 시인의 시적 지향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시는 삶과 죽음의 순환성에 마땅히 따라붙는 영원의 시간에 대한 확신이며 이것의 형상화를 위해 인간-자연으로 묶은 우주적 관계망의 압축을 잘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가령, 개체의 소멸이 또 다른 개체의 생성을 위한 전이와, 우주생명의 얽힘이 자타 구분없이 일심되며 자리바꿈되는 경이를 보여주는 다음 구절이 그렇다.

   

 

조금씩 햇빛은 물살에 깎이어 갑니다. 우리 살아 있는 자리도 깎이어 물 밑바닥에 밀리는 흰 모래알로 부숴집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

 

흰 모래 사이 피라미는 거슬러 오르고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

 

그대를 위해 사람들은 앞산 양지 쪽에 모여 있습니다.

   

 

삶의 침식(‘살아 있는 자리도 깎이어’)이 비극이나 슬픔으로 현상하지 않고 우주 운행의 한 과정이자 질서인 인식을 담백한 어조로 나타낸다. ‘죽은 사람’은 시간의 흐름에서 볼 때 이미 지난 일에 지나지 않지만, ‘죽은 사람’을 기억하는 행위는 죽은 사람에게 영원한 삶을 부여하는 ‘의식(儀式)’으로써 우주만물이 어느 하나라도 들고 남이 없이 온전함을 엿볼 수 잇다. 여기에는 죽은 사람을 기억하는 ‘사람들’이나 마치 제 운명의 순응으로까지 여길 수 있는 ‘피라미’의 역행조차도 아주 오랜 예날 화랑이 가는 길을 쓸어주었다는 별들의 운신처럼 눈물겹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시집에서 시인의 목소리는 첫 시집이 나온 이래 무려 이십 여 년 동안의 침묵이 결과한 무늬들이다. 첫 시집부터 시의 줄기를 이루어 온 기억과 시간, 자연을 인간 사회의 부조리와 존재간의 불일치 양상을 통해 좀 더 내밀화한다. 여기에서 만남과 여행은 중요한 시적 소재가 된다.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의 ‘알래스카’‘아이오와’‘백두대간’‘개마고원’ 등의 여행지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들과 『그대가 누구인지 몰라도 그대를 사랑한다』의 ‘고비사막’‘북극’‘몽골’ 등의 여행지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들은, 제각각 자신들의 정체성과 함께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아 그 소용돌이의 흔적을 몸에 새긴 반점처럼 늘 지니고 있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시간과 현실의 퇴적이 가져다 준 아이러니한 세계 내에서 힘겹게 자신들의 경계성을 아슬하게 지닌 존재이며(「Sam and Lee -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4」등의 시편들), 「실미도」처럼 비극의 역사 현실 속에 희생된 시대의 사생아들이기도 하다. 무엇에 떠밀린 듯, 여기저기로 옮겨 다니는 시인의 발걸음에서 잠언처럼 귓가를 때리는 목소리를 듣는다. 환영처럼 겪었던 어릴 때의 기억 속에 떠오르는 ‘얼굴없는 얼굴’(「실미도」)과 ‘넋 속에 넋을 남긴 그대들’(「몽골 북한 대사관 앞을 지나」)처럼 지금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자취가 역력한 채로 시인의 머릿속을 맴도는 표상들이다.

 

기억은 현재를 과거와 이어주게 하는 토대이자 바탕이다. 존재들의 현존성은 세월과 사회변화에 따라 더욱 밀도를 더해 가고 이미 공동체 안에서 사회적 시효를 다했다고 여겨지는 이름들이 시인에 의해 하나씩 불릴 때 이들은 시인의 유년을 포함한 개체적 자아가 시공간을 달리한 ‘영원한 현재’로 남는다. 언제든지 목덜미를 잡을 수 잇는 ‘지나간 시간’의 현현으로써 시인은 지난하지만 고독한 시적 탐색을 해왔던 것이다.

   

3.

 

이번 신작시들에서 시인의 표정은 끈질기게 기억과 자연 공간에서 접면을 형성하는 역사적 흔적을 담박(淡泊)하게 바라보는 점에서 이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첫 시집에 상재한 「그는 뒤에서」에서 표현한 것처럼 ‘돌아보면 뒤에서 언제나 뒤에서 부르는’ 존재에 결연한 시인의 몸, 그 각인된 몸이 떠돌아다니면서 토해낸 그림이다.

 

인간을 시간적 존재라 했을 때 이 시간은, 과거와 미래가 현재에 긴밀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시간이다. 시간의 길 위에서 밟아 온 땅과 앞으로 밟게 될 세계는 어느 때고 시적 언어의 자연스러운 비치에 의해 서로 합류한다. 초기 그에게 산이자 극지는 그것 자체로서만 시인에게 의미를 띠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목숨붙이들이 환하게 밝아졌다가 그 빛이 사그라졌던 장소이자 숭고미마저 느끼게 하는 절명의 지대였다.

 

신작시들에서 그런 엄숙한 표정을 전혀 볼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이 좀 더 누그러지고 안으로 말려들어간 대신 또 다른 세상의 낮고 그늘진 시간 속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처럼 숙연함을 자아낸다. 그러나 이는 애초에 시인이 떠나왔던 본래의 자연 공간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다. 허공에 숨어 있는 얼룩진 얼굴들은 극의 무의식에 부끄러움과 상처로 남아 있었을 기억들을 유유히 불러대고, 떠밀린 듯 취한 듯 발걸음을 돌리지만 이제는 그들과 함께 보냈던 다난했던 시간들에 회심(回心)하는 경지를 언뜻 보여주는 것이다.

 

「빙원의 끝 - 아내에게」에서 보는 것과 같이 ‘나도 나를 다 거느리고 얼음사막을 떠날 때가 되었다’는 마음가짐을 이끌어 내거나 ‘공포가 허공으로 바뀌어’(「얼음사막」)가는 허심(虛心)으로 나타난다. 얽힌 마음을 헹궈 정갈하게 마주서는 귀로의 전면에서 시인이 겪으며 통곡해마지 않았던 삶의 무거운 저울추는 어느 순간 허공으로 들어 올려져 헐거워진다. 현실의 상처는 맥박처럼 돌올하게 시인의 기억을 자극할 터이고 실상 시간의 결을 따라 가면서도 의지와는 무관하게 세월의 역류에 깊이 몸을 담갔던 지난날이었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세월이 주는 약으로써 지난날의 기억들과 삶의 부조리에 대한 감성적 고투의 체험들은, 다만 내면의 지향점이 정해져 있고 이전의 모든 의식과 실천을 한껏 밀어내면서 새로운 길을 가기 위한 소중한 밑거름으로 될 수 있을 때에만 유의미하다. 시인은 바다 위에 떠 있는 무인도와 같은 삶을 원했지만 바다로부터 세상과, 세상을 살며시 밀어제쳐 허공으로 소실되는 시ㆍ공간의 지경을 이어주고 맺어주는 몹쓸 기억의 상흔에 눈길을 줄 수밖에 없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그의 시의 변모는 이전의 시들에서 보여주었던 자연ㆍ여행ㆍ만남ㆍ기억의 연결고리가 팽팽해지고 느슨해지는 지점을 살펴보는 일에 지나지 않는데 「물소리」는 이러한 시적 양상을 가늠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물소리’가 지니는 뜻은 여러모로 상징적이다. 어린 시절의 체험에 강렬하게 각인되어 있는 소리이기도 하고 그 소리를 매개로 현재의 상념 속으로 끼어드는 화자의 복합적인 시간의식을 형성하여 환상으로까지 발돋움할 수 있게 한다. 어찌 보면 수묵의 풍경을 보듯이 고요한 정취를 담고 있는 이 시에서 시인은 ‘거슬러 오르’는 기억행위가 어릴 때의 기억을 다듬어서 유추한 회상과, 현실의 ‘장날’에서 마주친 이(‘태양초 팔고 돌아가는 이’)의 행보가 닿는 상상적 정경이, 주체도 대상도 없고 보는 자도 보여주는 자도 없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이다. 시의 형상화의 측면에서 이룩한 시적 창조성은 논외로 하더라도, 이러한 주객혼효와 시간인식의 불일치ㆍ융합은 그의 신작시들 통해 발견할 수 있는 특징 중의 하나이다. 이는 「지리산 가는 길」에서 시의 화자와, 해방공간에서 전쟁 무렵에 이르는 비운의 역사 현장 한 가운데에 있었던 사람들로 하여금 불꽃같은 삶의 장소를 마련해 주었던 ‘지리산’의 상징이 서로 녹아드는 지점이기도 하다. 시인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지나간 시간과, 그에게 선명한 이미지를 남겼던 체험이 언제라도 ‘소름’처럼 다가오게 만드는 지리 공간 속에 스며 있는 역사의 시간을 현재화시키는 감수성이 차오르는 것을 의식적으로 느끼면서도 이를 무의식적으로 표출한다. 마치 ‘바람도 불지 않는데/뒤에서도 불내가 난다.’(「지리산 가는 길」)와 같은 구절처럼 보조사(바람‘도’, 뒤에서‘도’)를 써서 자연현상과 지나간 시ㆍ공간을 한데 묶어내는 절묘한 인식과도 상관이 있다.

 

사람 중에서도 현실을 둘러싼 세상의 본질과 생명에 지극한 관심을 기울이는 존재가 바로 시인이라고 했을 때, 신대철 시인이 보여 준 시적 세계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혼돈과 쓰라린 기억들로 가득 찬 현실적 존재가 불온한 땅을 딛고 돌아가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 캐묻는 작업을 줄기차게 하고 있다. 이런 작업의 과정에서 자연과 생명은 그에게, 아니 그를 포함하여 인간이 저질러온 무수한 죄업과 피고름 같은 일들을 치유하는 토포스(topos)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흘렀다가 사라지는 기억들은 어느 순간 우리들이 의식하지 않는 사이에 서서히 시간의 지층에 희미한 무늬를 남긴다. 시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뒤에서 그를 덮치는 ‘불내’의 연원과 상흔 속으로 뛰어 들어 갈 준비가 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시간의 블랙홀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는다. 이를테면 선취된 허무로써 자연적 존재가 내뿜는 도수(度數)의 황홀한 이치를 나름 엿보았기 때문이 아닐까./<신생>2007년 여름.

 

 

[출처] 신대철론|작성자 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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