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이 사는 나라
― F.U에게*
이바라기 노리코(茨木のり子, 1926~2006)
그 사람이 사는 나라
따스한 살갗을 가진 그것은
부드러운 악수이자
낮은 톤의 목소리이자
배를 깎아주던 손놀림이자
온돌방의 따스함이다
시를 쓰는 그 여자의 방에는
책상이 두 개
답장해야 할 편지묶음이 산더미였는데
어쩐지 남 일 같지 않았던 기억
벽에는 커다란 옥 장신구 하나
서울 장충동 언덕 위의 집
앞뜰에는 감나무 한 그루
올해도 가지 휘게 열매 맺었을까
어느 해 깊은 가을
우리 집을 찾은 그녀는
창밖을 내다보며 가만히 중얼거렸다
황량한 정원 풍경이 좋네요
낙엽을 긁어모으지도 않고
꽃은 선 채로 말라 죽었고
주인으로선 부끄러운 정원이지만
있는 그대로를 좋아하는 손님 취향엔 맞았나보다
일본어와 한국어를 섞어가면서
어떻게 지내는지 이런저런 이야길 나누는데
괜히 떳떳치 못한 내 기분을 맞춰주려는 듯
당신과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솔직한 말투
산뜻한 자태
그 사람이 사는 나라
쏟아지는 뉴스나 흔해빠진 통계도
흘러나오는 대로 삼키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조율이 가능하다
지구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일이리라
서로의 경직된 정부 따위 내버려두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사귀어
작은 회오리바람이 될 수 있다면
전파는 자유롭게 퍼지고 있다
전파는 재빠르게 퍼지고 있다
전파보다 더디긴 하지만
무언가가 손에 잡히고
무언가를 되던지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외국인을 보면 스파이라 생각해라
그리 배웠던 나의 소녀시절엔
생각지도 못한 일이
* 한국 시인 홍윤숙을 뜻한다.
―『처음 가는 마을』 2019. 정수윤 옮김, 봄날의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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