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연애
이학성
내가 바라는 연애는 한시라도 빨리 늙는 것
그래서 은발(銀髮)이 되어 그루터기에 앉아
먼 강물을 지그시 바라보는 것
될 수 있다면 죽어서도 살아
실컷 떠돌이구름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거나
성냥을 칙 그어 시거에 불을 붙이는 것
아니라면 어딘가로 멀리 달아나
생의 꽃술에 입맞춤하는 은나비처럼
한 시절도 그립거나 후회 않노라 고백하는 것
그리하여 누구나의 애인이 되거나
아니 그것도 쉽지 않노라면
그리는 못 되어서 아득하게 잊혀가는 것!
―시집 『저녁의 신』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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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소나(persona)는 그리스 어원의 ‘가면’을 나타내는 말로, 칼 융에 따르면 “실제의 자아를 숨기기 위한 외적이고 인위적인 인격”이다. 그런데 융의 이 개념은 지나치게 엄격한 면이 있다. 누구라도 벌거벗은 몸으로 세상을 나돌아다닐 수 없듯, 가면을 쓴 인격은 이중성이나 기만과는 다른 넓은 의미의 사회성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SNS의 세계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페르소나는 긍정적이기보다 부정적이다. 인스타그램 속에서 아름다움과 화려함을 자랑하는 누군가의 삶은 철저히 가공된 모습일 가능성이 크다.
이와는 달리 예술에서의 페르소나는 흔히 작가의 분신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가령 시에는 화자가 존재한다. 화자는 시인 자신일 수도 있고 시인이 내세운 대리인일 수도 있다. ‘시는 사실이 아니라 허구라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문학을 설명할 때, 화자의 고백을 시인의 진실한 고백이라 곧이곧대로 믿고 싶어 하는 독자들에게 빼놓지 않고 하는 당부다. 소설 속 주인공이 작가 자신이 아니듯, 시의 화자 역시 시인과 동일 인물일 수 없어서다. 화자가 작가와 일치하지 않는다면 시의 진정성은 어디에 있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소월의 「엄마야 누나야」의 소년 화자나 만해의 지고지순한 여성 화자가 결코 시인 자신이 아니듯, 시의 화자가 시인과 순전히 겹친다고 오해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학성 시인의 「내 연애」를 읽으며 뜬금없이 시인과 화자의 일치 불일치를 떠올린 이유란, 시집에서 발견되는 ‘애인’이란 존재에서 비롯한다. 「자신에게만 관대함」에 등장하는 애인은 ‘젊은 애인’이다. 피부가 망가지니 샤워를 지나치게 하지 말라고, 오후의 커피와 흡연을 줄이라고, 거북목이 되니 모니터와 거리를 두라고, 너무 센서티브해서 숨쉬기조차 난처하다고, “나니까 봐주며 참고 견디죠” 눈 흘기는 애인은 잔소리만큼이나 화자에 대한 애정이 넘쳐난다. 「끽연가」에서 “자긴 왜 내가 은밀한 키스를 번번이 주저하는지 알아?”라는 걸로 봐서, 이 젊은 애인은 담배 냄새를 지독하게 싫어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매사 똑 부러지고 애정이 남다른 애인을 두고 다른 연애를 꿈꾸는 화자를 보며 절로 고민이 깊어진다. 게다가 바람기와는 상관없는 이 ‘연애’를 나 역시 은밀히 따라 하고 싶어지니 정말 큰일이 아닌가.
신상조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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