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와 미래
여세실
분갈이를 할 때는
사랑할 때와 마찬가지로 힘을 빼야 한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장마였다 올리브나무가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무엇을 잡아두는 것에는 재능이 없고 외우던 단어를 자꾸만 잊어버렸다
잎이 붉게 타들어간 올리브나무는 방을 정화하는 중이라고 했다 흙에 손가락을 넣어보면 여전히 축축한, 죽어가면서도 사람을 살리고 있는 나무를 나는 이제라고 불러본다 흙을 털어낸다 뿌리가 썩지 않았다면 다시 자랄 수 있을 거라고
이제야, 햇볕이 든다
생생해지며 미래가 되어가는
우리는 타고나길 농담과 습기를 싫어하고 그 사실을 잊어보려 하지만
이미 건넜다 온 적 있지 뿌리를 넘어 줄기를 휘감아 아주 날아본 적
양지를 찾아다녔다
산에서 자라는 나무의 모종 하나를 화분에 옮겨 심으면 야산의 어둠이 방 안에 넝쿨째 자라기도 한다는 걸
진녹색 잎의 뒷면이 바스라졌다
시든 가지에도 물을 주면 잎새가 돋았다
―시집 『휴일에 하는 용서』 (2023)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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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자고 일어나면 ‘또’ 달갑지 않은 소식이 들릴까 싶어 기사를 접하기가 두렵다고들 말한다. 노동자, 농민 들을 궁지로 내모는 정책이 발표되는 일은 부지기수고, 사회적 안전장치 하나 없이 당장에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이들이 부쩍 는 상황이 여실히 체감되는 요즘이다.
일부의 이득만 헤아리는 이기적인 감수성을 부추기는 발언이 정치권으로부터 들려올 때마다,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애써왔던 역사적 순간들, 또한 그를 위해 지금도 애쓰는 이들이 아무렇지 않게 무시되는 것 같아 속이 상한다. 아마 지금까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더 나은 삶을 위해 공들여왔던 바가 이룬 것 하나 없이 허물어졌다는 기분이 들어서일 것이다.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것 같다’는 심정적 판단은 ‘그 무엇도 하고 싶지 않은’ 허무에 쉽게 빠지게 만든다.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할까. 하면 보람은 있나. 할 수야 있을까. 달갑지 않은 기사들 앞에 선 이들이 가진 질문의 정체는 ‘이제 어쩔까’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여세실의 시 「이제와 미래」에서 화자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장마”가 이어지는 속에서 “올리브나무가 죽어가고 있”는 걸 예사로 넘기지 않는다. 올리브나무의 계속되는 삶을 위해 올리브나무가 뿌리 내리고 있는 땅을 솎아내고 다시 다지는, 식물을 돌보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행위인 분갈이를 한다.
나무를 향해 “이제”, 그러니까 ‘바로 지금’이란 의미가 담긴 이름을 부르면서 화자는 생명이 쉽게 꺼지지 않는다고 여긴다. 나무가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뿌리까지 썩을 것 같은 ‘바로 지금’ “흙을 털어” 땅을 다진다. “햇볕”이 들도록 보살핀다. 그러면 나무는 자신의 몸에 새겨진 기억을 따라, 자신의 씨앗에 담겨 있는 “뿌리를 넘어 줄기를 휘감아 아주 날아본” 경험을 따라 “잎새”를 돋울 것이다. 시는 살아 있는 존재에 내재되어 있는 축적된 기억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다. 시의 제목에서 ‘이제 와서 미래를 얘기할 수 있을까’와 같은 의심이 아닌, ‘이제(now)’와 ‘미래’를 함께 두고 말하려는 의지가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시인은 ‘이제 어쩔까’와 같은 걱정에 지금 해야만 한다고 판단되는 일을 행하는 것으로 응한다. 우리가 딛고 있는 땅과 뿌리를 다시 살피는 일에서부터, 거기에 축적되어 있는 애써왔던 기억을 살려내는 일에서부터.
양경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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